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안호상 국립극장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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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중략)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1962~ ) ‘꽃’ 중에서

고통 없는 곳에 예술은 없다
극장 담 너머 세상으로 가자

내 고향집은 골목 안쪽에 있어 늘 앞집 담장을 끼고 드나들었다. 흙과 돌로 쌓은 담장엔 찔레꽃·나팔꽃이 피었고 때론 앞집 마당에서 자란 해바라기가 그 위로 얼굴을 내밀곤 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과거로 나를 확 끌어들이는 감성에 먹먹해졌다. 아마도 어린 시절 꽃담의 추억과 지금 일터인 극장이 지닌 공통점 때문인 듯하다.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과 색다른 경험에서 피어나는 감동이 ‘경계’와 ‘꽃’으로 이어지니 예술이 가는 길을 암시하는 시인의 도저함에 놀랄밖에.

 극장에서 예술가들과 일을 하면서, 예술이란 많은 부분 경계에서 피는 꽃과 같다고 생각했다. 가치와 형식, 시대가 서로 부딪히면서 생긴 상처와 아픔이 흔히 예술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던 ‘국립’극장의 고루함을 깨기 위해 동서양의 낯선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소란을 떨고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다. 국립극장이 만드는 작품은 여러 ‘경계에서 피는 꽃’이 되었으면 한다. 마침 이번 시즌 국립극장의 포스터와 인쇄물 디자인은 모두 꽃이다.

안호상 국립극장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