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353)|제76화 화맥인맥 월전 장우성(72)|「4·19」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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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0년 4·19의거 때 나는 서울대미술대학 학생과장을 맡고 있었다.
미술대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대학처럼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다.
데모를 하던 고순자란 여학생이 희생되어 나는 대학을 대표해 박갑성 교무과장과 함께 조문을 다녀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치적인 문제가 풀리자 학생들은 학내문제를 들고일어났다.
학생들이 학장을 연금하고 학장 실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학장·교무과장 물러나라』고 외치면서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이 문 앞에 버티고 앉아있어 장발 학장은 점심도 굶고 변소도 못 갔다.
학생들은 학장 실에 들어가 당장 사표를 쓰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나는 학생과장으로 이런 사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서 장 학장과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장 학장에게 사표를 쓰더라도 학생들 앞에서는 쓸 수 없는 일이니 본부에 가서 쓰겠다고 말하고 학장 실을 빠져나가 집으로 가있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장 학장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그렇게 하겠다고 문을 밀고 나갔다. 나는 문을 밀어나가는 장 학장에게 내 연락이 있을 때까지 학교에는 나오지 말라고 하고는 내가 앞장서 나왔다.
학생들이 학장을 에워싸고 못 가게 길을 막았다.
또 한편에서는 길을 비키라고 야단이었다. 이때 학생들은 두 패로 갈려 있었다.
임종식군(역도선수)을 중심으로 한 학장반대파와 정태진군(태권도선수)을 중심으로 한 학장지지파가 있었다.
장 학장은 반대파들에게『사표를 써도 제군들 앞에서 써야할 이유가 없으니 본부에 가서 쓰겠다』며 학생들을 헤치고 씨억씨억 걸어나갔다.
학생들도「와」하고 장 학장을 따라가다가 되돌아와서 계속 학장 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지 않아 교수들도 그들과 함께 밤을 새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봤더니 학장퇴진보다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달라는 의견이 더 강했다.
요컨대 미학과 학생들은 미술대학졸업장을 받는 것보다는 문리대졸업장을 원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주장을 간파한 나는 새벽같이 장 발 학장 집에 달려가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자』고 제안했다.
장 학장은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내는 것은 좋은데 교수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나는 박갑성·박의현 교수도 함께 문리대로 보내면 될게 아니냐는 안을 내놓았다.
장 발 학장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와서 교수 회의를 소집, 의논 끝에 미학과는 문리대로 보낸다는 사실을 게시판에 공고하고 학장·교수들도 일단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자고 결의했다.
아침 일찍 게시판에 「미학과를 문리대로 보낸다」고 공고, 학생들의 예봉을 꺾었다.
학생들도 게시판을 보고 뜻밖이라는 듯 수군거렸다.
학생들이 한풀 꺾여 있을 때 이순석·박의현·송병돈 교수가 장 발 학장 집에 가서 학장을 데리고 학교로 왔다.
장 학장이 있는 자리에서 교수들이 일제히 사표를 써 모았다. 누런 서류봉투에 넣어서 학장에게 전달했다. 장 학장도 집에서 써 가지고 온 사표를 대 봉투에 넣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사무직원과 운전기사·사환까지 모두 사표를 써 가지고 왔다. 교수들은 학장을 앞세우고 죽 늘어서서 대학본부로 향했다.
법대를 지나 구름다리를 넘어 대학본부로 가는데 학생들이 교수들을 가로막았다. 『우리들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좋은 교수 만나서 공부 잘하라』고 했더니 우리를 따라오며 만류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도저히 교수 노릇은 할 수 없다』고 따끔하게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닭 쫓던 개 울 넘겨다보듯」멍하니 서있던 학생들도 우리들이 일제히 대학본부로 들어가는걸 보고 뿔뿔히 흩어졌다.
교수들은 윤일선 총장실에 들어가 사표를 제출했다.
윤 총장은 자신은 절대로 사표를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만류했다.
미술대학 교수들은 총장실을 나와 원남동을 거쳐 중앙청으로 걸어갔다.
이병오 문교부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 장관도 『왜들 이러느냐』면서 말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늦추지 않고 강경 자세를 취했다.
미술대학 학장·교수의 사표가 들어있는 누런 서류봉투를 장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교수들은 묵묵히 발길을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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