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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서 맞는 3·1절|『선구자』작곡 조두남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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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난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나라를 빼앗긴 겨레의 슬픔과 울분을 노래한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옹(7l·마산시서성동 삼익아파트1동1002호). 조옹은 해마다 3·1절이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50년전 만주 북간도의 용정마을에서 자신에게 이 노래의 가사를 던져주고 홀연히 사라진 『선구자』의 주인공 「윤해영」이라는 사람을 그리는 아쉬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1·4후퇴때 부인 김민혜여사(71)와 함께 월남, 마산에 정착한 뒤에도 수많은 문하생들에게 줄곧 이노래를 가르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족의 사람을 받아 우리의 대표적인 가곡으로 불리고 있건만 조옹이 애타게 찾는 윤씨의 자취는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로 맺어진 이노래의 후렴처럼 찾을 길이 없다.
5년전인 77년3월 창작활동을 하다 중풍증세로 몸져누워 요즘은 그가 평소 즐겨 산책하던 남해의 푸른물이 보이는 용마산공원에도 오르지 못한채 투병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조옹의 그리움은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곤하는 두 눈망울에 맺혀있을 뿐이다.
부인의 부축으로 피아노 건반앞에 앉아 왼쪽 한손으로 더듬어 보는『선구자』의 선율속에 잠겨 반세기전의 옛일을 회상하는것이 조옹의 일과이자 유일한 낙이기도하다.
평양이 고향인 조옹은 17세때인 1928년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울분을 달랠길 없어 유랑의길을 떠났고 3년뒤 한국인들이 모여살던 용정에 머무르며 작곡 활동에 몰두했다.
부유했던 선친덕에 당시 평양고녀를 나와 사범과에 다니던 누님 「말지나」(세례명)씨에게서 7세때부터 오르간을 익힌 조옹은 미국인 「조제프·캔노스」신부에게서 다시 피아노를배워 12세때 이미 『옛이야기』라는 작품을 낼만큼 작곡의 천재였다.
북만주로 건너가 모란강가 서장안가의 싸구려 여관방에서 청년기를 보내던 어느날밤 조옹은 한독립투사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같은 또래로 보이던 그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윤해영」이라고만 밝히고는 『당신의 훌륭한 솜씨로 이 가사에 곡을 붙여달라』면서 3절로된 가사를 던진뒤 1주일후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조옹은 이청년의 눈망울에도 조국을 잃은 설움이 가득함을 느껴 밤을 새워가며 5일만에 곡을 완성했으나 「윤해영」이라는 사람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조옹은 이노래의 가사에 있는 것처럼 독립투사들이 넘나들던 간도 용정고개에 있던 일송정, 그들의 한이 서린 해난강 물줄기, 밤마다 고국에의 향수를 달래주듯 울리던 용주사 종소리를 회상하며 작곡에 온 정성을 쏟았고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까지 붙였다.
해방과 함께 일제가 물러가자 조옹은 이 노래가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던 독립투사들의 울분이 그대로 담긴 곡임을 생각하여 제목을 『선구자』로 바꾸었고 가사도 일부분 고쳐 2절의 『활을 쏘던 선구자』, 3절의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등의 구절을 만들었다.
마산정착후에도 『제비』『그리움』『접동새』『산촌』등 가곡과 오페레타『에밀레종』, 피아노곡『회상』『두개의 광시곡』등 2백여곡을 작곡했고 지난해 10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곡의 밤에서는 조옹의 작품이 7곡이나 발표되기도 했다.
중풍으로 인한 언어장애까지 겹쳐 이제는 더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됐지만 그의 병상에는 그가 가르친 수많은 문하생과 이지방의 예술인등이 찾아오고 격려편지등이 잇달아 그의 노년은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마산=홍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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