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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형제 세 집이 담사이에 두고 나란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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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본채를 헐고 새로 지어>
3백년 넘어 한 집안이 한 땅을 지키며 지금도 도시 중심부에서 10촌이 넘는 일가친척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 있다. 전주시 교동2가 80번지를 중심한 일대는 일제 때부터 전주에서 이 학자(이덕가)집으로 널리 알려진 전의 이씨의 한 가문이 제각기 대가족형태를 이루어 살고 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한 울타리에서 10촌까지 32명의 식구가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다는 이근영씨(77) 집은 시골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가족형태를 이루고 일가가 나란히 집을 지어 모여 산다.
『우린 친형제뿐만 아니라 사촌형제에 이르기까지 분가해서 산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백년 전에 지은 집이 너무 낡아 사촌형제까지만 분가하기로 한 것이 5년 전입니다.』
전주의 한옥 보존지구이기도 한 이곳의 이씨 집은 헐기 전까지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로 손꼽혔다. ㄱ자 형태의 본채와 사랑채·별당 행랑채 등은 32명의 식구를 능히 수용할 수 있었으나 워낙 고옥이어서 뜯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씨의 설명.
바로 그 터에 본채의 형태를 그대로 딴 한옥 3채를 나란히 짓고 근영씨의 사촌인 춘영씨(55)·하영씨(48)가 한 채씩 나누어 가졌다. 집의 넓이는 대지 1백 80평에 건평 60평으로 똑같다.
『이조 영조 때 사도세자의 스승이었으며 성리학자였던 7대조 목산공(이기경)은 지금도 우리 가문의 정신적인 지주이지요.』
3백년 전 목산공이 심었다는 집 앞의 고목을 쳐다보며 그 후손들이 이 땅을 좀체 떠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교동 일대를 둘러보면 이씨의 15촌이 넘는 집안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고.
이처럼 분가했으나 아직도 제각기 대가족이다. 근영씨 집은 아들 주성씨(53·전주 재향군인회 직업소개소장), 주방씨(48·회사원), 주평씨(31·회사원)등 결혼한 3형제가 자녀를 낳고 모두 함께 살고있다.
앞집인 춘영씨·하영씨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3년 전까지는 대가족이었으며 앞으로도 자녀들이 모두 모여 살아 주기를 바라고 있다.
『32명의 식구가 살 때는 가마솥 하나가 두 사람이 팔 벌려 겨우 안을 정도의 크기였지요. 그런 솥 몇 개를 나란히 부엌에 걸어두고 며느리끼리 부엌일이며 빨래 등 집안 일을 분담해서 해왔읍니다.』

<"11식구는 소꿉 장난격">
근영씨의 부인 김갑순 할머니(76)는 요즘 대가족이라야 식구가 11명인데 5년 전에 비한다면 소꿉장난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전주는 예부터 인심이 좋아 전국에서 거지가 가장 많이 모였다는 곳이지요. 특히 시할아버지였던 어른은 거지를 그냥 보내는 법이 없어 항상 밥을 준비해 놓아야 했읍니다.』
춘영씨의 부인 유병생씨(47)도 함께 살던 지난 일을 이렇게 말해준다.
지금은 비록 울타리는 쳐 놓고 살고있지만 제사 때나 명절이면 8촌까지 30여명의 식구가 모두 큰집에 모인다. 얼마 전까지도 한집에서 함께 살던 한 식구여서 8촌도 친형제나 다름 없이 지낸다고 근영씨는 자랑삼는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여전히 3년 상을 지내며 초하루·보름 조석으로 상식을 올립니다. 도시에서 이 같은 전통을 지키는 집안이 드물어서 그런지 요즘 우리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이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모친 탈상을 아직 못한 할아버지가 늘 삼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 손자들에게는 무척 특이해 보이지만 그런대로 집안 자랑거리로 알고 있다는 근영씨의 맏아들 주성씨의 이야기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정말 기가막혔읍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대가족이었던 것이 무척 다행했던 것 같아요. 그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또 배웠어요. 가족끼리 화목 하는 법도 대가족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대가족을 권하고 있어요. 우리 애들도 전통을 지켜나가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읍니다.』

<가족끼리 화목이 중요>
유병생씨의 말.
세종대왕이 이씨 가문에 내렸다는 『가전충효 세수인경』(가정에서 전할 것은 충효며, 세상에 나가 지킬 일은 인경이다)은 아직도 이 집의 바꿀 수 없는 가훈. 집집마다 이 글을 대청마루에 크게 써 붙여두고 있다.
유교전통이 뿌리깊은 집안이긴 하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강권하는 법은 없다고 춘영씨는 말한다.
24년 전 춘영씨는 이 집안에서 처음으로 신식 결혼식을 올렸는데 집안에서 이를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이후 모든 가족이 자연스럽게 신식 결혼식을 올리게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연애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춘영씨는 올해 숙대를 졸업한 맏딸 주아씨(23)를 얼마 전 결혼시켰는데 이 역시 중매결혼이었다고 『아직 우리가족의 의식이 연애를 받아 들일만 하지가 못합니다. 나머지 3자녀도 중매결혼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드는 자녀를 가진 춘영씨의 의견.
『그런데 요즘은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집안끼리 따지는 것이 옛날에 비해 더 까다로와졌어요.』
옛날엔 가문정도나 따졌지만 요즘은 학력·재산·가족의 형태까지 다 따지게 되더라는 유씨의 경험담이다. 그래서 나머지 3자녀에게 중매결혼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내다본다.
하지만 맏아들 주호군(21·서울대)은 부모가 싫어하는 연애결혼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겠다고 답한다. 또 결혼해서 부모와 함께 살겠다는 뜻도 굳히고 있다. 그러나 동생이 만약 결혼해서 분가하겠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부모는 어차피 맏아들이 모셔야하지만 형제가 결혼 후 함께 살면서까지 모실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것이 주호군의 의견이다.
한집에서 맛있는 별식을 하면 아직도 울타리를 넘어 나누어 먹는 이씨 댁은 조상들의 많은 전설이 담긴 집 앞 공원 오목대에서 절기마다 모여 즐거운 놀이를 잊지 않는다.

<김징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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