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깨어진 물 주걱에 꽃 심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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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긴 겨울의 잠을 깨고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 소리는 제법 크게 참가에 와 닿는다. 겨울가뭄을 모두들 걱정하고 있던터라 오랜만에 비가 내리니 반갑기만 했다.
아까부터 비 내리는 창 밖을 주시하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국민학교 1학년 짜리 녀석이 『엄마』하고 부른다.
『엄마, 플래스틱 물 주걱 있잖아요. 깨져서 물이 새는 것 말이예요. 버리지 말고 손잡이만 떼어내고 거기다 꽃을 심었으면 좋겠어요.』
제법 어른스런 말에 난 잠시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제 봄이 오니까 우리 집은 꽃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서 물을 주고 가꾸어보자는 의견이다.
『아! 그래 정말 꽃을 심어야지….』 나는 아들아이의 한마디 말에 갑자기 이 봄에는 꽃을 심자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베란다바닥에 화분을 놓고 쇠창살 사이에 나팔꽃 덩굴을 올려야지, 아니 곧 팬지 몇 포기라도 얻어다 심자….
물이 새는 금 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사용할 줄 아는 알뜰한 생활의 지혜는 나 스스로 터득하고있다. 그러나 다가오는 봄을 우리 집 어느 한 구석에나마 심어보겠다는 정감 어린 마음은 어느 때부터인지 상실해 버리고 만 것 같다.
일년 내내 풀한 포기·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려운 시멘트바닥·시멘트벽, 그 공간에서 그래도 아이는 봄의 따사로움을 예견하고 이를 맞이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한 느낌이 든다.
정말이지 나는 몇 해를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거듭되는 불황 속에서 아빠가 하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데다 뛰는 물가고에 대응하여 꼭 필요한 것은 쪼개고 쪼개논 가계부의 숫자놀이 외에는 모든 것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었다.
하지만 이제 새해 들어 경기가 회복되리라는 소식이 자주 전해진다. 그러면 나에게는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겠지. 그러면 생활도 피어나고 마음의 여유도 생기리라.
깨진 물 주걱을 테이프로 붙여쓰자는 의견과 거기에 꽃을 심자는 생각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
올 봄에는 아이의 말대로 비좁은 아파트 안 어느 한 구석에라도 꽃을 심어보리라고 다시 생각해 본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가 다되어 간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다.
봄을 재촉하는 빗소리, 또 이를 일깨워준 아이의 한마디.
오늘은 냉이국이라도 끓이고 달래무침이라도 장만하여 저녁상을 푸짐한 봄냄새로 꾸며보리라.
시장바구니를 들고 대문을 나서는 마음은 다른 날보다 상쾌하기만 하다.

<대구시 남구 대명 8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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