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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란 혁명의 요인|이란 학생들이 압수, 출간…13책 8권 긴급 입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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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팔레비」의 이란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미국은 이란혁명의 성공으로 충실한 우방을 잃게되고 소련의 남하정책에 대한 방파제에 금이 가게 됐다.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은 이 혁명의 요인에 대해 1979년 6월(극비문서 제1책 3백20페이지 이하)과 10월(제1책 2백69페이지 이하) 두 번에 걸쳐 보고서를 냈다.

<각계각층 총망라>
6월 보고서는 이란혁명의 원인과 주역을 항목별로 나열하고 있다. 원인은 ▲지배층의 부패 ▲사회경제적인 급격한 변천 ▲국왕의 착오 등으로 나누고 구체적으로 그 실례를 들고 있다. 지배층의 부패로 ▲국왕의 개인적인 부패 ▲왕실재단인 「팔레비」재단을 포함한 왕족의 부패 ▲장관을 포함한 고급관료의 부패 ▲국왕의 친구인 51명의 지도급 기업인의 부패 ▲이란고급장교의 부패 등을 지적했다.
사회경제적인 급격한 변천으로는 ▲수십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게된 대기업인의 성장 ▲불과 5년만에 활과 칼 종류의 원시적 무기에서 최신예전투기 등 현대적인 무기로 장비한 대대적인 무기현대화정책 ▲석유가격의 폭등 ▲전문경영인과 고급기술자의 부족 ▲급격한 변화에 따른 문화적인 쇼크 ▲농업생산의 부진 ▲지역협조의 촉진을 도모한 미국의 외교·국방정책 등을 들었다. 부패의 소지가 사회경제의 갑작스런 변천에 있음을 보여주고 지나친 영양섭취가 오히려 사회발전에 해독이 되었음을 지적했다.
국왕의 착오로 ▲국왕과 일반서민과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국민을 올바르게 이끌 수 없었고 ▲일반서민의 침묵을 사회의 안정으로 착각한 것으로 진단했다.
이란혁명을 이끈 계층이나 지지한 계층은 국민의 각 계층을 총망라하고 있다. 물론 각 계층이 혁명달성에 공헌한 기여도는 다소 다르다. 6월보고서는 기여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아야툴라」와 「물라」등 회교지도자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이들은 정부의 억압정책으로부터 일반서민을 보호했다. 이란의 긴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국정에 참여하는 층은 한정되어 있었고 일반서민출신이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야툴라」들이 일반서민을 장악하고있는 정도는 중세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보다 훨씬 강했다.
둘째는 바자(시장)상인의 역할이다. 이들은 소위 51명의 대기업가와는 달리 이란의 전통적인 상인들로서 서구적인 생활양식을 싫어하며 신앙심이 두텁다. 이들은 이란의 중산층에 속하여 현대화정책에 회의적이었으며 정부와 특권층의 부패에 분개했다.

<낮은 급료에 불만>
이들은 회교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독실한 회교도들은 수입의 5분의1을 헌금했으므로 성직자들은 이 풍요한 자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며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부와는 달리 성직자들은 정직하여 이 헌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
세째는 전문지식인이다. 이란인구 가운데 약12%인 이들은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그 대부분은 젊은 층에 속하며 그 의식이 매우 개방적이다. 이들은 국왕의 측근만이 점차 비대해지고 자신들의 급료는 인플레 때문에 상쇄되어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이거나 감소되어 불만이 높았다.
실질적으로 이 전문지식인이 국가와 사회 각 기관을 경영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받는 댓가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네째는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이다. 이들의 생각은 개방적이며 급진적이어서 지하활동을 하는 정치적 지도자를 따르거나 이용당하여 혁명구호를 외치는데 앞장섰다.
다섯째, 민족적인 소수파인 아랍족 및 쿠르드족 등은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아무런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경제적 발전이 일부지역에만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데 대한 소외감을 느꼈다. 좌파들도 이러한 불만에 적극 호응했다.

<연합세력을 형성>
이보고서는 이란혁명을 특권층에 대한 일반대중의 반발로 보았다. 비록 이 특권층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종교적인 전통주의자, 서구식교육을 받은 민주적인 자유주의자, 소수민족 및 사회주의자로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특권의 상징인 국왕의 축출에는 모두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러한 이질적인 계층의 연합세력도 일반대중의 뒷받침 없이는 국왕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대중을 혁명대열에 합류시킨 지도자가 「호메이니」였다. 이 국왕 반대세력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란의 전통적 고유성을 좀먹는 서구, 특히 미국의 영향력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극비문서 제1책 2백69페이지).
이러한 분석과 더불어 이 두 보고서는 미국정보활동의 빈약성을 스스로 비관하고 있다. 미 국무성은 이란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문화적·종교적 및 경제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란인의 불만이 얼마나 깊은지 그 정도에 관한 몇몇 실마리는 잡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암시하는 몇몇 보고서가 있었지만 무시되었다(극비문서 제1책 3백21페이지).
이 근거로 1978년 중반에 나온 미CIA보고서는 이란사정이 모두 원만하다고 했으며 하원전문가의 보고서도 그와 비슷했다.
이러한 자료 때문에 「카터」대통령은 회교혁명의 성공이 예측되던 78년 12월6일「팔레비」국왕은 권좌에 남아 있어야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 성명은 데모군중을 더욱 자극했으며 「팔레비」정권과 미국을 동일시하는 결과를 빚었다.

<편파적인 미 언론>
한편 이 보고서는 미국언론의 편파적인 보도태도를 비판하고 이란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그 현장만을 보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예로 79년 전반기의 사형집행을 모두 정치적인 것으로 보도했다.
사형 당한 약3백명 가운데 정치범은 25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비밀경찰 사바크의 고문담당자이나 법법자들이었다.
이보고서는 이란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이란학생의 미국유학만 권장하는 일방적인 문화교류보다는 미국학생과 학자의 이란 행도 장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1책 5백36페이지 및 5백62페이지).
이 비밀보고서의 이란혁명분석과 자생적인 비판태도는 이미 때늦은 것이었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객관성은 엿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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