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막는 '넛지' … 빨간선 광안대교, 사고 30% 줄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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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용호동 방면으로 나가는 부산 광안대교 곡선부 차로. 2012년 강렬한 색을 따라가는 심리를 이용해 굵게 붉은 선을 그은 결과 교통사고가 크게 줄었다. 내년엔 적정 속도 때 음악소리가 나오게 하는 기법이 도입된다. 넛지효과를 이용한 안전사고 예방설계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 부산시설공단]

부산 해운대와 용호동으로 진입하는 광안대교 곡선부에선 사고가 잦다. 긴 직선 구간에 갑자기 급커브 구간이 나타나면서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2011년에는 18건의 사고가 났다. 광안대교를 관리하는 부산시설공단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2012년 8~9월 감속 운전을 유도하기 위해 차로 가운데에 빨간 도료로 굵은 선을 그었다. 붉은 선을 따라가는 심리를 이용하면 차선 변경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실제 2012년 10~12월 사이에 해당 구간의 교통사고가 1건에 그쳤고, 2013년에도 13건에 머물렀다. 2011년에 비해 약 30%(5건) 줄어든 것이다. 시설공단 관계자는 “교통량이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교통사고가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며 “내년에는 적정속도 때 음악 소리가 나오게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를 계기로 심리적 요인 등을 고려한 사고 예방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이른바 ‘넛지(Nudge) 효과’ 설계다. 서울대 법안전융합연구소장 권동일 교수는 “대형사고는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는 심리가 여러 요인과 맞물릴 때 일어난다”며 “설계 단계부터 선제적으로 사고를 막을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제시했다. 이미 범죄 예방 차원에선 이러한 예방디자인(셉티드·CPTED)이 도입되고 있다. 우범지역에 거울을 설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안전사고에 대한 예방설계는 걸음마 단계다. 서울대 디자인과 이순종 교수는 “지금까지의 안전 설계는 주로 내구성 등에만 치중했을 뿐 인간 행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디자인이 사고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추락 사고가 일어났던 판교 테크노밸리 주변 환풍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정도 떨어진 분당 서현역 인근의 한 환풍구는 하늘색 피라미드 조형물로 돼 있다.

 경기도 시화공단의 한 공장에도 지난해 넛지 효과 디자인이 도입됐다. 2012년 공단에서 수차례 발생했던 불산 누출 사고 때문이다. 설계를 맡은 김현선디자인연구소는 근로자들의 작업 형태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사고가 작업을 마친 뒤 밸브 등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소는 밸브가 완전히 잠기면 발광다이오드(LED) 불빛이 켜져 웃는 얼굴이 나오도록 했다. 또 위험물을 취급하는 장소는 어두워도 볼 수 있는 야광 도료로 표시했다.

 최근 건축업계에서는 성능 위주 설계(PBD·performance based design)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간 법규에만 얽매이다 보니 최소한의 안전기준만 지키는 데 급급했다는 반성에서다. 특히 다중이용시설에는 이러한 예방 설계가 필수적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심리적인 혼란이 가중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총리실이 지난 4~5월 전국 주요 시설 24만 곳을 점검한 결과 다중이용시설의 안전불감증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본지 10월 7일자 14면). 청소년수련시설·쇼핑몰·극장 등 다중이용시설들에 대한 지적 사항이 4만 건 중 8000여 개에 달했다.

 가천대 소방방재공학과 최돈묵 교수는 “법으로 모든 안전기준을 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내 안전은 내가 지킨다는 시민의식 변화와 함께 주요 시설물 설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화·이서준 기자

◆넛지(nudge)=‘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 명령 등 직접적인 개입 대신 가벼운 간접적 개입으로 다른 이의 선택을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 리처드 탈러 교수 등이 공저한 『넛지(Nudge)』를 통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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