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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사음악회에 빠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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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태준
시인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아침에는 단풍을 마주보고, 해 떨어지는 저녁에는 낙엽을 줍는다. 중국 원대 사람이었던 마치원의 시 ‘추사(秋思)’를 읽으니 참 좋다. “마른 등넝쿨과 늙은 나무와 황혼의 까마귀//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과 외딴 집 한 채// 옛길과 서풍과 수척한 말 한 마리// 석양은 서녘으로 떨어지는데// 하늘 끝 가슴 시린 저 사람이여!” 가을날 읽는 이런 절절한 시구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쇠락의 기운이 꽉 찼으니 그냥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전국의 절에서 산사음악회가 한창 열리고 있다. 지난주에 부산시 연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도심 사찰 혜원정사에 다녀왔다. 백일장 심사를 위해서였다. 혜원정사 백일장은 올해로 17회째를 맞았다. 절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백일장을 열어왔다는 사실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해마다 오전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열고, 저녁에는 지역주민들을 위한 산사음악회를 열고 있다. 산사음악회는 올해로 13회째를 맞았다. 혜원정사 주지 원허 스님을 뵈었더니 차를 내주시면서 “모두가 박수 치며 웃고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려고 애썼어요”라고 조용하고 은은하게 말씀하셨다.

 이달 초에는 서산 부석사에 다녀왔다. 부석사 산사음악회에서 시를 낭송하기 위해서였다. 부석사 사찰음식연구회인 ‘공양청’과 부석사 신도들이 연잎밥과 여러 사찰음식을 내놓았고, 절을 찾은 사람들은 큰 나무 아래나 돌계단에 앉아 저녁 공양을 즐겼다. 부석사 산사음악회는 12년 전에 동네 목수가 판자를 잇대어 무대를 만들고, 스님과 신도들이 전구를 매달면서 소박하게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은 “우리 산사음악회에는 높은 사람이 없어요. 조금 틀려도 괜찮아요. 그게 바로 우리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심검당과 목룡장 아래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았다. 아주 유명세를 타는 가수들의 출연은 없었다. 그러나 비보이팀 공연, 승무, 첼로 연주 등에 산사음악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환호했다.

 고개를 드니 달이 높이 떠서 가고 있었다. 달을 올려보았을 때 나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지은 한시가 생각났다. “빈 산에 달빛이 너무나 많아(空山多月色) / 홀로 가면서 끝까지 깨끗하다(孤往極淸遊) / 누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저리도 멀리 갔나(情緖爲誰遠) / 밤은 깊고 아득해 거둘 수도 없다.” 공산(空山)에 가득한 달의 맑고 깨끗한 빛을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이처럼 빼어나게 노래했다. 달이 홀로 가되 그 가는 행로의 끝에서도 깨끗하게 유지된다니!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 즉 정서(情緖)가 멀리 이동한다는 발상 또한 단연 압권이다. 달이 흘러가듯이 연모하는 마음이 움직여간다고 쓴, 동적인 대목은 얼마나 빛나는 감각인가. 빈 산을 낱낱이 비출 듯하고 게다가 그 빛이 그지없이 빛나고 맑을 뿐인 달빛. 흐리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은 달빛. 올해 부석사에서 올려다 본 가을 달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전국의 사찰에서 가을에 산사음악회를 열어온 지는 벌써 꽤 오래되었다. 봉화 청량사의 산사음악회는 ‘산사음악회의 원조’로 불리고 있다. 청량사의 산사음악회는 2001년 처음 열렸고, 해마다 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찾고 있다. 청량사 산사음악회에는 객석이 따로 있지 않다. 사람들은 전각과 비탈에 앉아 산사음악회를 즐긴다. 스크린을 곳곳에 설치해서 어디에 앉더라도 무대의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날에 청량사는 절 전체를 사람들에게 내준다. 청량사 둥근소리 합창단, 사물놀이 꼬마풍경, 어린이 밴드 등의 공연은 대중가수들의 공연 못지않게 이름이 났다.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날 특별한 행사를 함께 마련하는 곳도 많다. 가령 부안 내소사는 괘불재를 함께 열고, 경주 골굴사는 선무도를 시연한다.

 김시습은 “새로 지은 시를 낙엽 위에 쓰고// 저녁 찬으로 울 밑에서 꽃을 줍노라// 나무들 옷을 벗자 온 산은 여위어 간다”고 써 가을의 정취를 노래했다. 산사를 찾고 산사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함께 즐기는 일도 이 가을의 각별한 추억이 될 것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