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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제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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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옛 서적을 뒤적이다 섬뜩한 대목을 발견했다.

 “1986년 10월. 장세동 안기부장이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지시라면서 ‘87년 4~5월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6~8월 중 총선을 치르고, 9월 총리와 대통령을 선출한 뒤 각하 퇴임 때까지 5개월 정도 지도를 받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비상선진계획’이라 명명했다.”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었던 박철언 전 의원이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비상계획대로라면 또 한 차례 계엄포고령에 의해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을 거다. 하지만 역사는 민주주의가 또 한 번 죽는 걸 허락지 않았다.

 그로부터 8개월 뒤. 기억하시는지, 이 문구.

‘오늘은 기쁜 날, 차(茶)값은 무료입니다.’ 87년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자 서울 명륜동 ‘가화’라는 다방에 붙은 벽보의 글귀다. ‘오늘은 기쁜 날’이라 환호할 만했다. 전두환 정부의 내각제 개헌 시도, 이원집정(二元執政)제로의 절충 시도, 호헌(護憲) 시도를 ‘피플 파워’가 무력화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날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30년이 지났다. 다시 1987년 체제(대통령 직선제+5년 단임제)를 바꿔야 한다는 개헌론이 꿈틀댄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대통령·총리가 외치·내치를 분담하는 이원집정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기쁜 오늘’의 기억은 하나둘씩 사라져 간 다방과 같아졌다. 1980년대에 이원집정제를 말하면 ‘사쿠라’ 소릴 들었는데 격세지감이다. 특히 오스트리아 제도를 콕 찍어 말했다. 왜 오스트리아식일까. KOTRA 국가정보에 나온 설명이다.

 ▶대통령=임기 6년, 1차 연임 가능. 군 통수권, 외교에 관한 권한. 실제론 상징적인 지위.

 ▶총리=대통령이 임명. 현실적으로 다수당 당수. 조각(組閣)시 대통령이 재가. 행정 전반에 책임. 각료에 대한 실질적 리더십.

 한 원로 정치학자는 갸우뚱했다.

“오스트리아는 내각제적 요소가 강하며,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제와는 차이가 꽤 있는데 왜 오스트리아였을까.”

 하지만 지금 국회엔 김 대표 말고도 내각제에 가까운 이원집정제 지지론자가 꽤 있다. 다수당 중진이 실질적 권한을 갖는 총리가 될 수 있는 제도라서일까. 여야 중진일수록 선호하는 인상이다.

 한국 정치에 맞는 옷인지는 의문이다. 대통령 임기 중 야당이 총선에서 1당이 되면? 박근혜 대통령에 문희상·문재인·박지원·정세균 총리 내각이 짜인다면? 이원집정제의 출발은 지금 대통령제가 ‘제왕적’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현재의 대통령이 제왕적인지, 혹 제왕적 요소가 있다면 대통령과 여당 간의 수직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외치와 내치를 나누면 제왕적 요소가 제거될지부터 따져야 한다. 국민 정서와도 다르다. 한길리서치가 18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한 지지가 35.9%, 5년 단임제가 26.3%, 이원집정제는 17.9%, 의원내각제가 6.5%였다.

 이원집정제가 답이든 아니든 김 대표가 개헌 논의의 방아쇠를 당겼다. 논의 자제를 당부했던 박근혜 대통령에겐 사과했지만 “연말까지 논의가 없어야 되는데 죄송하다”거나 “‘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 우리 당에서 개헌 논의가 일절 없기를 바란다”는 식이었다. “정기국회가 끝나면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질 것”이라는 예상까지 거둬들인 게 아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개헌보다 경제에 집중했으면 할 테지만 87년 체제에 모순이 존재하는 한 국회에서의 논의 자체를 막을 순 없다.

 역사적으로도 개헌에 관한 한 대통령이 주체가 되면 늘 실패였다. 개헌을 밀어붙이려 했던 대통령이나, 막으려 했던 대통령 모두 오점을 남겼다.

이럴바엔 정기국회 이후 제대로 된 봇물이 터졌으면 한다. 일부 중진을 위한 개헌 논의여서도 안 되고, 개헌을 빌미로 정치세력화를 꾀하려는 시도여서도 안 된다. 개헌은 4900만 국민이 공유해야 할 어젠다다. 국민투표로 완성되는 게 바로 개헌이다. 불순하면 실패한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