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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임정 부주석 「엔테잠」의 비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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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암바스·아미르-엔테잠」. 이란 회교혁명이 성공한 직후 수립된 임시정부의 부수상이었다. 현재는 무기수로 이란 형무소에서 복역 중. 죄명은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반혁명 간첩활동.
본사가 입수한 미 극비 문서 책자 제10책에는 미국 CIA가 그에게 「S·D·PLOD/1」이라는 암호명을 부여한 것으로 되어있다. (10책 페이지 16l)
왜 그에게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을까.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인가. 미국 극비문서 제10책에 그 전말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공개 돼 있다.

<밴스의 극비지령>
「리처드·커탐」. 미 피츠버그대 교수. 한때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이란 문제에 관한 훌륭한 책도 저술했다. 국무성 극비문서에 따르면 이 사람이 「인테잠」과 접촉한 최초의 미국인이다(10책 페이지7). 시기는 78년12월 말부터 79년 1월3일 사이. 「팔레비」가 망명하기 2주일 여전이다. 「커탐」교수는 테헤란 미국 대사관도 모르게 「인테잠」과 접촉, 그 결과를 국무성에 보고했다. 「커탐」은 미국과의 접촉을 그에게 강력히 권고했던 것이다. 「밴스」당시 국무장관은 「커탐」의 보고를 토대로 「월리엄·실리번」주 이란대사에게 그와의 접촉을 극비문서로 지령했다. 「실리번」대사는 이 지시에 따라 정치담당관 「론·스템펠」로 하여금 당일로 「엔터잠」과 접촉토록 했다. 「엔터잠」은 당시 「이란해방운동」이(LMI=Liberation Movement of Iran)의 중앙위원이었다.
LMI는 반「팔레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대중 조직체였다. 「엔테잠」은 앞서의 「커탐」교수와의 면담에서 「팔레비」이후의 예상되는 문제까지 토의한 터였다. 「엔테잠」은 「스템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맘」(호메이니)의 귀국 일자를 귀국에 알리고 싶습니다.』
『의회가 섭정위원회를 승인하도록 미국이 도와주셔야겠읍니다. 그런 다음 「팔레비」는 이란을 떠나야하고 그가 임명한 마지막 수상인 「바크티아르」 는 사임해야 합니다. 그 뒤 섭정위원회도 해체돼야 하고 「이맘」의 법통이 보장돼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미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79년1월9일자 「설리번」의 극비보고 전문)
「팔레비」는 그로부터 1주일 뒤인 1월16일 이란을 떠났다.
「엔테잠」은 「팔레비」 출국 다음날(1월17일) 「스템펠」과 만난다. 『「팔레비」가 이란을 떠난 뒤 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호전되고 있읍니다. 미국의 협조에 감사합니다.』 (79년1윌17일자 「설리번」전문보고) 「팔레비」는 「설리번」대사로부터 여러 차례 출국 종용을 받았던 것이다.
「엔테잠」은 특히 군부 쿠데타의 방지를 위해 미국이 장성들과 접촉한데 대해 감사 한다고 말했다. 「팔레비」가 떠난 뒤인 1월19일 에도 데모는 계속됐다. 반「바크티아르」집회였다.

<미국관리와 밀착>
「엔터잠」과 「스템펠」은 다시 만난다. (1월12일 「설리번」의 전문보고)
▲「스템펠」=「호메이니」와 「바크티아르」는 타협해야 합니다. 타협은 아직도 좋은 해결책 입니다. 「바크티아르」는 법통을 갖고 있읍니다.
▲「엔테잠」=「이맘」은 현 지배계층의 어느 누구에게도 법통을 인정하지 않고 있읍니다.
▲「스템펠」=「이맘」에게 타협만이 유혈을 막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엔테잠」=그건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로써 끝난다. 그러나 당시 「엔테잠」이 미대사관 관리와 만난 유일한 「호메이니」계열의 인물은 아니었다. LMI(이란 해방운동)의 지도자 「타바솔리」도 미대사관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회교공화당 당수 「모하메드·베헤슈티」도 미국인들과 접촉했었다.
그는 81년 6월 반「호메이니」게릴라들이 회교공화당사를 폭파했을 때 숨졌고 그 뒤 순교자로 추앙되고 있다.
「엔테잠」이 이 회교혁명을 배반한 간첩으로 몰린 것은 미국 관리와의 밀착 때문이었다. 79년2월 「호메이니」의 귀국과 더불어 혁명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엔테잠」은 「바자르간」수상내각의 공보담당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엔테잠」은 온건파로 자처했다. 그는 혼란이 몰고 올 결과를 우려했으며 미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란 안의 공산주의자들과 「호메이니」에 관한 정보를 미국측에 제공했다.
79년4월 당시 미대리대사 「찰스·나스」는 「엔테잠」을 방문해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를 다시 역설했다. 「나스」대리대사는 이란의 안정과 독립이 미국의 최대 관심사임을 「호메이니」에게 확신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엔테잠」은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호메이니」 주변 인물 때문이라고 불평했다. 그는「나스」와의 면담에서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제공을 미국측에 요구했다. 미국은 이란의 인접국인 아프가니스탄·이라크, 그리고 쿠지스탄(이란·이라크·터키에 걸쳐 있는 고원 사막지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로 동의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 안에서 「엔테잠」의 위치는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성직자들에 불만>
「엔테잠」은 7월 초 「나스」의 후임 대리대사인 「브루스·레인건」에게도 회교성직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79년 7월말쯤 부수상직에서 밀려나 스웨덴주재 이란대사로 부임한다. 물론 그곳에서도 미국 관리와의 접촉은 계속된다. 「레인건」대리대사는 「엔테잠」의 대사 부임에 앞서 스톡홀룸주재 미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소개한다. 주이란 미대사관의 정치담당관 「스템펠」은 8월5일 스톡홀룸으로 가 「엔테잠」을 만나며 그에게 미CIA정보원 1명을 소개한다 (극비문서책자 10책 폐이지91).
「레인건」대리대사도 스톡홀룸의 「엔테잠」과 접촉을 했다. 79년10월13일 「엔테잠」을 만난 「레인건」은 회교 지도자들과의 보다 폭넓은 접촉을 미국정부가 강력하게 희망한다고 전했다(10월15일자 「레인건」의 보고전문). 「엔데잠」은 회교지도자들을 만나되 중요한 문제는 논의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엔터잠」은 이 자리에서 「바자르간」수상, 「야즈디」외상, 「알리· 샴란」국방상 그리고 자신은 현대화 추진세력 이라며 『그러나 우리들은 소수파』라고 했다.
그는 이날 많은 얘기를 했다. 『임시정부의 많은 각료들은 이란이 미국과 소련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잘 유지해야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읍니다.』
『미국은 이란·미국간의 현안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 온건세력을 돕는 길입니다. 그런 문제란 무기의 부품공급, 미국 회사들과의 계약파기로 빚어진 소송, 그리고 보다 많은 이란학생들의 미국유학 허용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혁재서 사형선고>
「팔레비」가 미국에 입국한 79년10월22일 「레인건」대리대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엔테잠」은 물론 이란 임시정부는 「팔레비」의 미국 입국이 몰고 올 이란에서의 정치적 반발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79년11월4일, 이란의 미국대사관은 회교과격파 학생들에게 점령됐다. 바로 그 시간에 「레인건」대리대사는 이란외무성에 가 있었다. 「레인건」의 사무실은 자물쇠로 채워져 아무도 열 수가 없었다. 다른 방의 비밀문서들은 일부 불태우거나 찢어 없앴지만 「레인건」 방의 극비 서류들은 그래서 고스란히 과격파 대학생들의 손에 넘어갔다.
혁명재판소는 「엔테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의 공로가 일부 참작돼 무기로 감형됐다.
「압바스·아미르-엔테잠」-테헤란대학 공학부를 졸업(55년), 미 버클리대학의 경제학 석사(64∼66년). 66년부터 4년간 미국에서 취업한바 있는 친미파였다. 「엔터잠」은 회교 성직자들의 정치술수와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오류를 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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