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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인생 「뉴서울 곡예단」단원 18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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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집 나왔다가 부모 잃어>
『집은 대구부근 같아요. 쌍둥이 자매 가운데 하나였는데 동생 이름이 을숙이, 내 이름이 일숙이라는 것 외에 성씨도 모르고 있어요.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시내 쪽으로 나왔다가 그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5살이었지요.
지금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그때 혹시 날 내다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러나 대구지방에 가서 공연이라도 하게되면 요즘도 유심히 관객을 둘러본답니다. 혹시 날 닮은 여자가 없는가 하고요.』
공중곡예사 이일숙양(24).
『지금 군에 가있는 오빠와 아주 어려서 집을 나왔어요. 오빠 이야기로는 우리 집이 의정부라고 하지만 오빠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집을 나와 이곳저곳 다니다가 곡예단을 만났는데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 그전에 있던 곳 보다 나은 것 같아 재주를 배우며 곡예단에 머물고 말았지요.』
마상곡예에 능한 심미숙양(18).
『부모가 다 곡예사였어요. 어려서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부터 곡예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난 곡예가 재미있어요. 어머니가 서울서 날 학교에 보냈지만 그냥 뛰쳐나와 버렸어요. 꼬마 곡예사 김은정양(13).
구정을 전후하여 광주에서 공연 터를 잡은 뉴서울 곡예단(단장 심동선)은 대부분 이들과 같은 사고무친, 외로운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불어대는 트럼펫 소리는 항상 애조를 띈다. 곡예단의 유일한 젊은 부부 심광철(25)·박상희(25)씨는 3살 짜리 딸 수경양과 함께 이들 외로운 18명 단원이 모두 한가족이라고 했다.
1년에 12번씩 자리를 옮기며 함께 숙식을 하는 곡예단은 비록 혈연이 아니라도 모두 흉허물없는 한가족일 수밖에 없다.
심씨의 부모도 10대에 걸쳐 곡예를 시작한 곡예가족. 어머니 김금자씨(53)는 30년대 이후 중국이나 만주에까지 공연을 하러 다녔을 정도로 지난날 유명한 곡예사였다. 3남2녀 중 장남인 심씨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부모의 직업을 이어 받은 셈.
부인 박씨는 여고를 졸업했을 때 동네에 찿아든 서커스단에 매료, 무턱대고 따라 나섰다가 심씨와 결혼했다. 18살에 결혼한 박씨는 그 동안 춤과 노래를 배워 지금은 곡예단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고있다.

<새벽 5시 일어나 연습>
겨울이면 따뜻한 남도지방에서 시작, 한 달에 한번씩 북쪽으로 옮겨가며 공연하는 이들 떠돌이 가족은 높이 1m50cm 정도의 무대 밑에다 방을 만든다.
무대밑 한가운데 좁은 통로를 만들고 양편으로 한 평 남짓한 방을 다섯 개씩 모두 10개를 만든 후 끼리끼리 나누어 숙식을 한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방안에는 간이 찬장·옷장 등 생활용구가 그런 대로 구색을 갖추고 있다. 한번 이사에 트럭 7대가 동원되는 곡예단의 이삿짐에는 각자 사물을 넣어두는 궤짝이 함께 옮겨진다. 공연장소를 옮기고 텐트를 치는데 3∼4일이 걸리고 그 이외의 날은 한결같은 연습과 공연.
새벽 5시면 일어나 연습하고 10시부터 연속공연 사이사이에 말 타고 시가지를 들며 관객을 모은다.
공연이 끝난 저녁 10시 이후엔 유일하게 9인치 흑백TV를 가진 심씨의 한 평 방은 초만원을 이룬다.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하고 협조를 해야하는 것이 곡예의 속성 이어서인지 가끔씩 단원끼리 불화가 생기면 그들이 처음 집을 떠나 올 때처럼 그렇게 홀홀히 곡예단을 떠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통틀어 보아야 5개밖에 없는 곡예단을 전전하다보면 다시 옛 곡예단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이곳의 풍속도.
뉴서울의 한 곡예사도 국내 5개 단체를 두 번씩이나 옮겨 다닌 경력이 있다고 귀띔해 주는 사람이 있다. 현재 전국 5개 곡예단에 곡예사는 50여명이지만 이 가운데 1급으로 꼽히는 사람은 20명 정도. 이들 곡예사 가운데 곡예단을 옮겨 다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다. 부평초 가운데 부평초라고나 할 이들은 그래서 애틋한 정이나 진한 연대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재주는 열심히 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삼나무를 심고 매일 열심히 뛰어넘는 연습을 해 보세요. 삼나무가 키높이 이상으로 자랐을 때도 힘들이지 않고 뛰어 넘을 수 있는 법이에요.』
공중회전을 5번씩이나 한다는 이일숙양은 연습이 바로 재주라고 단언했다. 『줄타기도 처음은 땅위 10cm 정도에서 배워요. 그러다 보면 공중에 올라가고 쉽게 탈수 있지요. 아뭏든 공중에 올라가면 저절로 신이나요.』

<1급이라야 월 30만원>
김은정양의 말. 『20년 전까지만 해도 곡예단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어요. 단원도 한 단체에 1백명 정도는 됐구요 .또 그 많은 단원들이 모두 여관에 투숙할 수도 있었는데 요즘이야 곡예에 미친 사람 아니고는 할만한 직업이 못됩니다.』
심씨는 곡예단의 인기가 자못 안타깝다고 했다.
그네 타기·외발 자전거·외줄 타기·마상곡예 등 20여 가지가 넘는 곡예를 모두 잘하는 사람이라면 숙식을 제공받고 월 30만원을 받는다. 심씨 부부의 경우 두 사람이 30만원을 받아 그 가운데서도 얼마간을 저축하며 언젠가는 떠돌이 신세를 면하겠다는 꿈을 가꾸고 있다.
이제 옛시절의 추억이나 향수 속으로 사라져 가는 곡예가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 예술은 아니라 해도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대중예술이란 차원에서 정부나 독지가들이 이를 보호하고 키워 주었으면 하는 것이 곡예단의 바람.
사회의 외면 속에서도 곡예 가족끼리 모여 인정과 보람으로 명맥을 잇고 있으나 연습도중 동료가 다치거나 병이라도 앓는 날이면 손님들 부르는 악단의 연주가락은 더욱 구슬퍼져 가기만 한다. <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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