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가장 길었던 사흘(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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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2공화국 행정수반 장면 총리. 그가 반도호텔 로비를 서성거리고 있던 시간, 제2공화국도 방향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심야의 호텔 로비에서 긴장과 초조, 불안과 분노에 휩싸여 서성거리는 장 총리를 떠받칠 누구도 곁에 없었다. 그것은 대들보가 허물어져 가는 제2공화국을 표상하고 있었다.

<참모총장 기다려>
장면 총리가 제1보를 받은 것은 새벽2시가 좀 못되어서였다. 장 총장은 경호대장 조인호 경감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이것을 총리에게 연결시킨 것이 조 경감이다.

<○사단에서 장난하려는 것을 막아놓았고 지금 해병대·공수부대가 들어오려고 해 한강에서 막고 있습니다.><어떤 군인들인가? 반란인가?><극소수고 술 취한 군인들입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무슨 소리야, 내가 1주일 전에 말한 그것 아닌가?><아닙니다. 별것 아닙니다. 염려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이리로 와주어.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매그루더」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네, 했읍니다. 조처를 끝내고 바로 가겠읍니다.><그래 곧 좀 다녀가게.><곧 가겠읍니다.>
장 총리는 옷을 챙겨 입고 참모 총장을 기다렸다. 참모종장은 <별것 아니다>라고는 했지만 예감은 불길했다.
역시 경호책임자인 조 경감도 무언가 해야할 것 같으면서도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문득 한강근처에 사는 송원영 공보비서관을 떠올렸다. 그는 송 비서관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을 알려 지혜를 빌릴 참이었다. <이 밤중에 웬 일이오?>
한참만에 전화를 받는 송 비서관의 잠에 취한 목소리를 듣게 되자 말은 엉End하게 나와버렸다. <해병대가 술 먹고 한강에서 육군헌병과 맞서 있는데 총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장 총장의 보고가 있었어요… 총소리가 들리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연락하는 겁니다.><네 에…고맙소, 수고하세요.>총리는 연신 시계를 보았다. 조 경감은 부동자세로 지켜 서 있었다. 어느새 20여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봐 검찰총장을 불러.>조 경감이 전화를 들었다. 총리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귀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일단 피하시는 것이 좋겠읍니다.>
장 총리의 부름을 받고 나타난 이대희 검찰총장이 재촉했다. <아니야, 참모총장이 오기로 돼있는데!>결국 총리는 로비로 내려왔다. <세단은 눈에 띄니까 제 지프를 타고 가시죠. 일단 제집으로 모시겠습니다.>총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장 총장을 기다렸다.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지프 운전 수가 없다. 총소리에 놀란 검찰총장 운전 수가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경호경관들은 아래층을 찾아 헤맸다. 바로 그때 현석호 국방장관이 들어왔다. 김업 국방부 사무차관, 한통숙 체신장관과 함께였다. <나와 계셨군요. 장 박사! 사태가 여의치 않으니 일단 피신하셔야 겠읍니다.><아! 현 장관이로구먼.>장 총리와 현 장관은 무의식중에 손을 잡았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글쎄, 이 사람과 함께 가려고 해.>그러면서 장 총리는 이 검찰총장 쪽에 눈을 돌렸다. <이 자리를 속히 피하시죠.><내 걱정은 마시오.>더 이상 말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저는 육본으로 나가 수습을 할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그때도 지프 운전 수를 찾지 못했다.

<굳게 잠긴 미대사관>
할 수 없이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언뜻 호텔 앞 미국대사관이 떠올랐다. 장 총장이「매그루더」에게 연락했다면「마셜·그린」대리목사도 위급한 사태를 알고 있음직 했다. 한 경호경관이 대사관으로 달렸다. 육중한 철제 셔터가 가로막은 채 불빛하나 없었다.
그때 현관을 지키던 경관이 시청 앞 광장 쪽으로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소리쳤다. 조 경감이 다급하게 총리를 승용차로 밀어 넣었다. 이때 총리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유리가 깨어졌다. 안경을 찾을 틈이 없었다. <이 총장도 함께 내 집으로 일단 가도록 하지.>총리가 말했지만 운전 수를 찾아 이 총장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승용차는 호텔 뒷문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큰길을 피해 청진동 뒷골목을 택한 총리 승용차는 한국일보 맞은편의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앞에 멎었다. 총리가 대사관의 정보책임자 S를 찾으라고 했다. 조 경감이 문을 두드렸다. 한참만에 나온 한국인 수위에게 긴급사태를 전했다. <미스터 s를 만나면 알게 된다. 먼저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충직한 수위는 안에 들어가 허락을 받아야 문을 열 수 있다면서 사라졌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조간신문을 찍는 한국일보의 불빛아래 총리의 승용차가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누군가가 총리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생각, 너무 더디게 움직이는 수위, 총소리는 다가오고, 이래서 그곳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명륜동의 총리자택으로 향하는데 원남동 쪽에 군용차의 행렬이 보였다. 바로 혜화동 로터리 건너편에 있는 칼멜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원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승용차는 지체없이 수녀원에 빨려 들어갔다. 수녀원장은 비밀을 약속했다. 총리의 피신을 알게된 다른 2명의 수녀도 파란 눈의 원장과 함께 새벽의 일을 말하지 않겠다고 천주님께 맹세했다.
현 국방장관이 장도영 총장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것은 새벽2시쯤이었다. <반란이 일어났읍니다. <누가 하는 짓이오?><박정희 소장이 주동입니다.><총장은 지금 어디 있소?><서울지구 방첩대입니다. 빨리 나오셔서 이 사태를 수습하셔야 겠습니다.><국무총리께 연락은….><방금 피신해달라는 연락을 해 놓았습니다. 국방장관께서 즉시 나와 주십시오. 시간이 매우 조급합니다.>현 장관은 지체없이 방첩대로 나왔다. 장 총장은 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우선 장 총장에게 긴급대책을 말기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후 현 국방이 전방을 염려하자 <문제없읍니다. 서울도 곧 수습될 것으로 봅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육본이 접수되었다는 급보가 방첩대로 날아들었다. <나는 반도호텔로 가서 장 총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올 테니 즉시 육본으로 달려가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하도록 부탁하오.><알겠읍니다. 저도 사태수습을 해놓고 그쪽으로 가겠읍니다.>이런 곡절을 거쳐 반도호텔로 달려온 현 장관이었다. 현 장관은 장 총리의 안전한 피신을 확인하고 방첩대로 돌아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시청 앞 로터리에서 무장군인과 맞닥뜨렸다. <누구요.><나 국방장관인데….><할 수 없습니다. 국방장관이라도 곧 내리시오. 혁명이 일어난 것을 모른단 말이오.>내릴 수밖에 없었고 무교동 큰길가 지금의 대한체육회 앞에 오더니 거기 서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동승했던 한 체신장관·김 국방차관과 함께였다. 시계바늘은 4시를 지나 있었다. 4시의 피난이니 장 총리가 제1보를 받고 피신하기까지엔 2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 총리가 한일은 줄곧 참모총장을 기다린 것뿐이다. 이것은「별 것 아닌 일」이라는 장 총장의 그릇된 보고가 원인이다.
뒷날, 왜 비서들마저도 부르지 않았느냐고 했을 때 <소수군인의 탈선행위라고 하고 참모통장이 조처를 한다는데 나야 참모총장을 믿을 수밖에…>라고 했다. 그렇다해도 총리가 기다리기만 하다 허둥지둥 피신해야 했던 까닭은 한밤중의 총리실 공백이다. 총리의 숙소이자 제2의 집무실로서 「총리공관」이라고 해야 했던 반도호텔에서 장 총리는 3개의 특실만을 썼다.
이곳엔 로비의 경비실을 포함해 20여명의 경호경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밤 11시가 지나면 숙소주변은 5명의 경찰이 지킬 뿐이었다.

<총리실 공백도 문제>
애초 총리실 경호책임자 티오는 총경이었고 노영균 총경이 맡고 있었다. 그런데 4월에 우 총경이 치안 국 인사계장으로 전보되고 후임이 줄곧 공석인 채였다. 이런 장기간의 공석은 조 경감에 대한 총리의 마음씀 때문이었지만 치안국으로선 난처한 문제였다.
당시 청와대 경호책임자 티오 역시 총경이었다. 그런데 청와대측은 3월 하순에 조병옥 내무장관 시절의 총경이던 문정기씨의 경호책임자 발령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발령을 내려던 참인데 공교롭게도 총리실의 경호책임자가 경감이 되고 말았다. 치안국으로선 총리실을 경감으로 둔 채 청와대만 총경을 배치할 수 없어 함께 발령하기 위해 청와대 쪽 경호책임자 임명도 늦추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청와대에선 독촉이 오고 난처해진 치안국에선 <총리비서실에서 처리를 안해주어 문제>라고 해 총리비서실과 청와대 비서실간에 마찰까지 일으킨 문제였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총리실 경호책임자는 조 경감이었다.
그런데 조 경감은 충직하기는 했지만 경찰의 실무경험이 없었다. 조 경감은 고아로 노기 남 신부 슬하에서 자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장 박사에게 천거된 이래 줄곧 장 박사의 그림자였다.
그는 장 박사를 대신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충복이었지만 그러기에 총을 들고 총리 주변을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일이라고 만 믿는 융통성 없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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