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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이 그리도 급박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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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흔히 금융은 경제의 혈맥이라고 한다. 자금은 있으나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잘 모르는 쪽으로부터 자금은 없으나 활용할 아이디어와 열정이 있는 쪽으로 돈이 흐르게 함으로써 생산의 증가를 가져오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은 소액 저축을 모아 거액 투자자금으로, 단기예금을 장기대출로 전환해 경제 발전을 돕는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동시에 공인된 도박장이기도 하다. 과잉과 탐욕, 패닉, 위기로 점철돼 온 것이 세계 금융사다. 멀쩡해 보이던 시장이 하루아침에 패닉에 휩싸이고 위기로 치달아 경제를 마비시키고 개인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다. 위기를 겪었던 나라는 대부분 위기 이전의 잠재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장기 침체를 겪으며, 추세선상의 경제 성장과 국민소득을 영영 회복하지 못한 것이 과거의 경험이다.

 필자는 금융 발전과 정책에 대해 지난 30여 년간 공부하고 또 직접 정책을 다루기도 했으나 솔직히 아직 금융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 어떻게, 어떤 충격 요인이 방아쇠를 당겨 금융시장과 경제를 혼돈으로 몰아넣을지 예측하기 어렵고, 늘 새로운 위기는 과거와 다른 탈을 쓰고 오곤 한다. 그러나 지난 3월 스탠리 피셔 미 연준 부의장이 스탠퍼드 경제정책연구소(SIEPR)에서 일생 동안 경제정책에 뛰어난 기여를 한 인물에게 주는 상을 받고 기념 만찬에서 한 연설에는 많은 공감을 하고 있다.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가 정리한 ‘지난 20년간의 위기로부터 배운 10가지 교훈’ 중 몇 개를 소개해 본다.

 첫째, 건전하고 튼튼한 금융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의 절대적 중요성이다. 같이 외부 충격을 받더라도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추후 회복세는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둘째, ‘거시건전성 감독’의 중요성이다. 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뿐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건전성을 상시 점검해야 하며, 이를 위해 때로는 비전통적 규제수단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 때 이스라엘 경제가 세계 금융위기의 와중에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저금리 정책하에서도 부동산 거품이 일지 않도록 규제감독 수단을 동원해 주택담보대출의 실질 비용을 올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셋째, 평상시에 경제를 건전하게 운영해야 위기 시의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시에 신중하게 재정·통화 정책을 운용하고 적시에 필요한 구조조정을 해내야 경제가 충격에 빠졌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세계는 1980년대 이후 연속적인 금융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80년대 남미의 외채 위기,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 2007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금융위기를 맞았다. 금융위기는 과다 부채에서 비롯되며 위기 이후 부채의 축소 과정(deleveraging)에서 심한 경기 위축이 일어난다. 80년대 남미 위기와 90년대 아시아 위기 시에는 미국과 유럽이 신용을 팽창해 세계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았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후에는 미국·유럽의 재정 확대와 중국의 대폭적 신용 팽창으로 그나마 세계 공황을 막았다. 통화정책은 제로금리로도 안 통해 양적완화 수단까지 동원했다. 이제 미국·유럽의 재정여력도 소진됐고, 통화정책도 정상화의 길을 걸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중국의 신용 팽창은 중국 경제를 거품과 과잉투자로 몰아넣어 또 다른 금융위기의 싹을 키우게 됐다. 세계 경제는 과거와 같은 성장을 이어갈 연료가 소진됐으며, 침체가 장기화하고 회복세가 더딘 것이 이제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 됐다.

 국내 경제는 97년 위기 이후 공적자금 투입과 국가부채 증가, 가계부채 확대로 성장 모멘텀을 이어왔다. 그것도 미진해 공기업 부채 확대도 동원됐다. 이제 가계부채는 턱에 찼으며 주요 공기업들은 과다 부채로 이자도 제대로 못 갚는 지경이 됐고, 국가재정은 증세 없는 복지 확대와 경기 부양으로 날로 악화되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당초 예상보다 낮을 것으로 예측되나 이는 주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지난 2분기의 위축에 기인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지금 경기 사이클로 보아 상승국면에 놓여 있다. 하반기나 내년 성장률 예측치는 우리의 잠재성장률과 비슷하거나 다소 웃도는 수준이다. 부채 조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그럼에도 현 경제팀은 LTV·DTI 등 거시건전성을 위한 규제수단을 풀고 재정적자를 확대하며 한국은행을 압박해 역대 최저 금리로 단기 성장률 높이기에 올인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개방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대내외 충격에 따른 위기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다. 위기 시에 사용할 정책수단들을 소진시킬 만큼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이 그리도 급박한가?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