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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혁명전야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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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1년의 정치는「3월 위기설」과「4월 위기설」에 부대꼈다. 윤보선 대통령은 그해 3월 정례기자회견에서 위기설에 대해『지금은 난국이기는 하지만「위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장면 총리도 4월13일 참의원에서『위기설은 조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옥외집회의 사전신고, 경찰기동대 창설, 정계요인의 경호강화 등이 그런 조치의 하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군의 동원태세도 갖추도록 지시했다. O씨(6∼9대 의원)의 증언.
『경찰력으로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면 진압지휘는 ×관구 사령부가 맡게되어 있었어요. 나는 ×관구 산하△사단의 작전참모로 이 작전을 담당했습니다. 작전의 1단계는 관구 사령부 직속 5개 헌병중대, 2단계는 제△·제○사단병력 및 건설공병단의 출동이었습니다. 3단계는 야전군의1∼3개 보병사단 지원입니다만 이는 도상에만 있는 구상이었구요. 4·19 1주년 기념일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 직전에 강변에서 모의훈련을 했지요. 이때 참관하러온 지휘관들에게 내가 브리핑을 했는데 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도 참석해 있었습니다.』

<학생들과도 연결>
5·16주체들은 4월7일의 회합에서 군의 서울 진입이 예상되는 4·19 1주년 기념일을 D데이로 정했다.
데모 진압을 위해 출동할 부대엔 손이 미치고 있어 정부를 접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서울 진입군의 지휘본부로 정해진×관구 참모장 K씨(전 중정부장·무임소장관·8, 9대 의원)의 증언.
『이 작전은 민주당 정부가「비둘기작전」이라고 했지만 기실「OP-56」이었어요 (OP는 오퍼레이션 즉 작전의 약자). 이것은 4·19때 시행된 작전입니다. 4·19 1주년에 대비한 작전도 OP-56이었고 우리가 5·16거사에 적용한 작전도 이걸 응용했습니다. 4·19를 통해 5·16예행연습을 한 셈이 되지요.』
아무튼 D데이 준비는 진행돼 나갔다.
4·19계획은 대규모 데모사태라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래서 출동준비와 함께 데모에 관한 정보수집을 해야했다.
『우리는 학생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강상욱 중령·박종규 소령이 담당했는데 7명의 학생이 적극적으로 도왔지요. 물론 그들에게 군의 거사계획을 알린 것은 아니고….』강상욱씨 그리고 민간인으로 참여한 이학수씨(광명인쇄회장) 의 증언이다.
4·19전야도 긴장의 순간이었다. 박정희 소장도 사태발생 즉시 서울에 와 거사를 지휘하기 위해 L-19경비행기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4·19는 평온하게 지나가 계획은 불발로 그쳤다. 그 사흘 뒤인 4월22일 계획을 손질했다. 두 번째 D데이는 5월12일. 심야의 비밀출동이라야 했기 때문에 부대의 재편성, 서울주변의 지형정찰, 주요기관점거병력의 편성을 새로 짜야했다. 거사의 명분도 4·19출동을 이용할 때와는 달라야 했다.
이래서 5개 반이던 조직을 작전반과 행정반으로 단순화했다. 작전반은 오치성 (연락책) 이석제 유승원 김동환 이형왕·유근왕 이지찬 전용건 정치갑 도홍정 정병주, 작전반은 강상욱 (연락책) 길재호 옥창호 박원빈 신구창 이백일 조창대 오학진 김형욱 김제민.
행정반의 업무는 민주당 정부의 주요정책을 분석비판하고 긴급한 시책을 입안하는 것, 거사에 따른 공약포고문 성명서 메시지작성 등이었다. 이석제씨(당시중령·전 총무처장관·감사원장) 의 증언.
『정신없이 바빴지요. 혼자서 책, 자료보따리를 들고 각 연구소 도서관 등지를 헤맸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혁명의 성패도 알 수 없는 판에 차분히 검토해 정책들을 마련했다고는 할 수 없지요. 당시 33세이던 내가 한다해서 얼마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뒤에 다녔고 당시의 신문·잡지 등에서 지적한 문제를 주로 수집했습니다. 정치적 법적인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황산덕(후에 법무장관)한태연(유정회소속 의원)두 교수도 찾아갔지요. 특히 한 교수에게는 솔직히 말했습니다.
혁명하겠다고 까지는 하지 않았지만<이런 꼴을 더 볼 수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자료지만 15일 밤 태워버렸습니다. 그날 밤11시쯤 지휘부인 ×관구 사령부에 갔더니 혁명 저지군이 나와 뒤엉켜있기에 뒷골목에 나가 불태웠지요. 그 당시 김종필씨가 혁명내각의 장관은 신망 있는 민간인으로하고 주체들은 차관을 말아 일을 추진하자고 했기 때문에 민간인 각료명단도 마련해 가지고 있었어요.

<최고회의도 성안>
그러나 우리가 실패할 경우 거사와 관련 없는 분들이 애꿎게 고생할 것 같아 서둘러 불태웠지요. 민간각료 기용문제에서 나는 극렬 반대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혁명을 제대로 하려면 완전히 장악해야한다. 민간인 기용은 나중 문제다>그랬지요. 그런데 김종필씨가 끝내 우겨서 민간각료대상자명단을 만든 거지요. 그 대신 최고회의를 만들자는 내주장도 채택되어 이것도 성안했었습니다.』
작전반은 글자 그대로 작전계획수립. 연락책이던 강상욱씨의 회고.
『우리에겐 계획도 치밀해야 했지만 그 계획대로 움직여줄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핵심동지들에 의해 포섭된 장교들 가운데<지도자의 얼굴도 모르고 생명을 거는 모험을 하느냐>라는 항의도 있고 해서 작전지시도 할 겸 4월28일 우리 집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명동 샤보이 호텔 뒤의 3층 건물 옥상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 집의 1, 2, 3층을 다방·바·당구장으로 세를 놓고있어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장교들이 모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내 집 안방에 상을 차려놓고 중앙에 박정희 소장, 좌우에 8기 대표인 오치성 대령과 9기 대표인 내가 앉아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오면 소개를 했지요. 박 소장은 술을 한잔씩 따라주면서 함께 건배했고…. 이날 모인 동지들은 80여명이 됐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들은 아래층 다방과 당구장·사보이 호텔 커피숍에 흩어져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의 눈길을 끌지 않는데라지만 역시 80여명의 장교들이 득실대니 이상했던지 방첩부대에 있던 동기생 조석일이가 찾아와 불러내더니<야 너 요즘 이상한 일을 한다며…자꾸 어울리면 좋지 않아>그랍디다.<회장 집이라고 외출 나온 김에 한잔하다 들르는데 어떡하니>그랬지요.』

<방첩대서 찾아와>
이런 과정을 거쳐「5·12계획」은 진척되어갔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군사혁명사는 그 이유를 『이종태 대령의 비밀누설 때문』이라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태 사건은 4월21일에 발생해 5월초에 이미 일단락 된 것이어서 그 이유가 되지 못한다.
『5·12계획의 연기는 ○군단강 박림항 중장 △사단장 채명신 준장 ×사단장 박춘식 준장 등 야전군 (1군) 내 장성들과의 합의가 미진했던 것, 그리고 장도영 참모총장의 속셈을 알 수 없었던 것 때문이다』라는 것이 김재춘씨의 설명이다.
『5월11일 밤을 뜬눈으로 새운 박 소장은 12일 급거 서울로 올라와 곧장 L·19경비행기로 야전군 사령부로 날아가 야전군의 세 장군을 차례로 만난다. 이 면담의 가장 큰 소득은 박림항 장군의 적극적인 동조를 확인한일이었다.』
주체들의 이런 증언은 5·12계획연기의 배경을 설명하고있다.
또 하나의 이유, 장 총장의 모호한 태도는 끝까지 그들을 불안하게 한 최대의 변수고 수수께끼였다고 말한다.
『장 총장은 분명 묵인하고 협조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어요. 이것이 이종태 대령의 고의성 있는 사건누설, 그리고 잇달아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장 총장의 묵시적 지지가 흔들리고 점점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장 총장의 반대라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도 연기는 불가피 했지요.』H준장 K대령 등의 일치된 증언이다. 그 무렵 장 총장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5·16주체, 민주당각료 모두가 장도영 총장은 거사계획을 사전에 통보 받고 묵인 협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스턴 미시간 대 교수로서 지금은 스탠퍼드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있는 장도영씨는 전화인터뷰에서 이를 단호히 부인했다.

<″거사계획 몰랐다〃>
『거사를 사전에 의논 받은 일이 없다. 당시 장면 총리와 현석호 국방장관이 박 소장이 관련된 쿠데타 음모가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조사하라고 내게 지시했다는 얘기도 <오래된 일이어서 확실한 기억이 없다>. 내가 참모 총장을 맡았을 때 정치 사회 등 각분야의 질서가 잡혀있지 않았고 군 내부에서까지 장면 정부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설이 있었다.
총장을 맡고 나서보니 사방에서, 즉 여러 개의 장교 그룹, 심지어 민간인 정객들까지 여러 갈래의 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조사하기에 무척 바빴다. 박 소장 주동의 쿠데타도 보고 받아 방첩대에 조사를 시켰다.
이 조사도 그 무렵 몇 개의 거사정보중의 하나로서 조사도중에 이게 터졌다. 내가 관련되지 않았다는 객관적 증거가 있다.
사태발생직전 정보를 받고 내가 취한 부대출동 중지명령 등 사태전압 조치는 미온적이 아니었고 알고서 눈감은 것이 아니다. 또 5·16새벽4시 반에 육本에 온 박 소장이 현실화, 합법화 해달라 했지만 나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러다 그날 하오4시 반에야 박 소장에게 OK했다. 그때는 서울이 관건 장악돼 기정 사실화되어 있었고 유혈진압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장면 총리를 찾아가 나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했더니 장 총리도 흔쾌히 응락 해 주어 마지막 국무회의를 내가 주선한 것 아닌가. 5·16후 여러 기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물어와 이런 얘기를 했는데도 신문에 보도되는 건 언제나 다르게 쓰여집디다. 나의 말이 정확하게 보도된다면 내게도 더 많은. 자료와 할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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