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일본기업이 한국투자 42년,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저는 20년간 직원의 고용을 지켰습니다."

일본 최대의 화학섬유회사인 도레이의 마에다 가쓰노스케(前田勝之助.74.사진) 명예회장은 감원을 하지 않는 경영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그에게 '마지막까지' 그 원칙을 지켰는지 물었다. 그는 1985년 도레이 임원이 됐고, 87년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최고경영자(CEO)가 된 이후 한 번도 그 원칙을 깬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고용을 유지하겠다'는 말은 그동안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며 "고용을 지킨다는 것은 직원 개개인의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구조조정으로 남는 인력이 생기면 무조건 이들을 끌어안고 가는 게 아니라 일부는 자회사에 보내고, 이직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새 직장을 알선하며 전직(轉職) 훈련을 시키는 방식으로 직원들의 일자리를 지켜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아웃플레이스먼트(퇴직 대상자에 대한 전직 훈련) 서비스는 국내에서도 포스코 등 일부 대기업이 시행 중이지만 아직 널리 퍼져 있지는 않다.

마에다 회장은 지난 10일 한국 정부로부터 외국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63년 한국나이롱㈜에 나일론 제조 기술을 이전한 것을 시작으로 99년 5억 달러를 투자해 새한과 공동으로 도레이새한을 설립하는 등 자본 투자 및 기술 이전, 공동 연구를 통해 한국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날 서울 신라호텔에서의 인터뷰에서 그는 "42년간의 한국 투자를 높이 평가해줘서 기쁘다"고 했다. 도레이는 한국에서 도레이새한을 비롯해 삼성전자와의 합작사인 스테코, 삼성전기와의 합작사인 스템코 등 6개사에 투자하며 모두 4500명을 고용하고 있다.

또 도레이는 ㈜코오롱의 지분 10.29%를 보유해 이웅열 회장 일가(16.54%)에 이어 2대 주주다. 도레이는 왜 기업 하기 힘들다는 불평이 곳곳에서 나오는 한국에 투자하고 있을까. 마에다 회장은 "한국에 투자할 때는 일본 국내에 투자하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원가 경쟁력 차원에서 투자하고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다르다는 설명이다. "한국은 인재가 많고 신제품 개발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레이의 수출 기지로서 매우 의미 있는 곳입니다. 일부 전자소재 산업은 한국에서 수요가 워낙 많아 아예 한국에 생산 공장을 마련했습니다. 멀리 내다보고 투자한 만큼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마에다 회장은 "훌륭한 대기업과 국제적 감각을 지닌 경영자가 많아 한국 경제의 전망은 밝다"고 했다. 요즘 불황 때문에 힘들지만 주눅 들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세계의 공장' 중국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 화학섬유산업에 대해서는 "5년 전 일본도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다"며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정부와 업계가 힘을 합해 이겨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레이를 비롯한 일본 섬유산업도 80년대 중반 이후 엔고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때 마에다 회장은 당시의 상식이었던 '탈(脫) 섬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섬유산업이 일본에서는 성숙 산업이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성장 산업"이라며 섬유 사업의 글로벌화를 적극 추진했다. 동시에 의약.의료.전자정보재료 등 첨단 사업 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그는 당시에 "도레이는 사람으로 치면 만성 당뇨병과 급성 폐렴을 함께 앓고 있는 것과 같은 심각한 상태"라며 '대기업병'에 걸린 직원들의 의식 개혁도 촉구했다.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고 임직원을 하나로 통합한 결과 도레이는 97년에 연결 매출 1조 엔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마에다 회장은 일본 재계에서 '도레이 중흥의 아버지'라는 격찬을 들었다. 도레이는 2002년 3월 창업 이래 처음으로 영업 적자를 냈다. 미국 경제의 하락세, 중국산 저가품 공세, 일본의 금융 불안 등으로 사업 환경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97년 대표이사를 후임에 물려주고 회장으로 물러났던 마에다 회장은 그해 5년 만에 다시 구원 등판했다. 특이하게도 그를 다시 부른 것은 노조였다. 노조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마에다 회장에게 CEO로 복귀해 도레이를 재건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돌아온 회장' 마에다는 경영 개혁 프로젝트 'NT(뉴 도레이) 21'을 밀어붙여 결국 성공했다. 2004 회계연도에 일본에서 섬유 사업을 하는 회사 중 흑자를 낸 곳은 도레이뿐이었다.

마에다 회장은 경영자의 덕목으로 '리더십''선견지명''균형감각'을 꼽았다. 그는 56년 도레이에 엔지니어로 입사, 50년 가까이 한 직장에만 근무했다.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게이단렌(經團連) 상임이사, 아시아 화섬연맹 명예회장 등을 맡고 있는 일본 재계의 거물이다.

글=서경호, 사진=최승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