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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집성촌 영일군 성동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경북 영일군 구룡포읍 성동리-.
영천 황보씨가「출 한양」이후 4백여년, 맺힌 한속에 조상의 얼을 지키며 숨어 살아온「바빌론의 강변」같은 마을이다.『아마 더 갈 데가 있었더라면 더 도망갔을 것입니다. 땅 끝까지 말입니다. 더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주저앉아 산것이지요.』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이라는 한나라의 영의정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당한 일족이 가문과 성명을 보전하려 뿔뿔이 흩어지던 당시를 후손 황보항씨 (50)는 이렇게 말했다.
지봉의 손자 단이 여종 단양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20여리 떨어진 구룡포읍 대보리 집신골에서 성장, 황보 가문을 보전한 뒤 4대를 숨어살다 단의 증손 억이 이 마을로 옮겨 터를 잡았다.
『전하는 말로는 억자 할아버지가 이 근처를 지나시다 참나무잎사귀에「황보씨세거지지」라고 벌레가 쏠아 먹은 자국을 보시고 터를 잡았다고 하데예. 예전에는 온산에 소나무·참나무가 꽉 들어차서 그야말로 산중이었지예. 아마도 숨어살기 좋아서 찾아든거 아니겠는교.』
마을의 가장 어른 격인 황보제씨(78)의 마을 내력 설명.
현재도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룡포읍이지만 정작 읍내까지는 8km, 포항까지는24km나 떨어진 외진 산골이다. 5백여m밖 동네를 감싼 산마루를 넘어서면 바로 해안, 1km밖에 바다가 열리지만 산 하나로 바다와는 담을 쌓고 들어앉은 산촌. 한눈에 세상과 거리를 두고 외톨로 살기 좋은 마을이란 느낌이 든다. 아마도 고려말 사문동이 이런 곳쯤 자리했을 것도 같다. 농사가 생업의 전부. 바다가 발아래 있어도 학문하던 선비의 전통을 지켜 근농근학으로 가풍을 세웠다.
벼슬길은 막혔지만 명문의 긍지는 오히려 뼈에 사무쳤기에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자식들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면학의 전통을 대대로 지켜왔다. 2백90여년만에 조상 지봉이 역적의 누명에서 풀려 거꾸로 충신으로 추앙을 받기에 이르자 황보씨가 이 고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향반(향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어려운 때 학문을 놓지 않은 덕분이랄 수 있다.
대를 내려오는 동안 수도 늘어 현재 잣뒤로 불리는 본 마을에 40호, 이웃 상성·달길 마을에 30여호 등 성동리90여 호 가운데 70여 호를 차지, 성동리는 전국최대 황보씨 마을이 됐다.
영조22년 황보씨가 다시 세상에 떳떳이 성명을 밝히고 살수 있게되면서 후손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상의 사우(사우)를 세우는 것. 이스라엘사람들이 신전을 세우듯 후손들은 의로운 조상의 사당을 세웠다.
사당은 고장 선비들에 의해 광남 서원으로 확장. 발전되고 황보씨는 서원을 지키며 일대에서 지도적인 유림(유림)가문으로 행세해 살았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2월이면 전국의 황보씨들이 모여 선조를 기리는 제사를 올린다.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조상의 가법대로 일가간에 화목하고 근면·검소·성실하게 사는 것이 우리집안 자랑이라면 자랑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수백 년을 숨어 살다보니 이렇다할 유물이나 문적(문적)도 전해온 것이 없고 농사만 짓다보니 재물도 모르고 옛것만 고집하다 신교육을 못시켜 출세한 사람도 없으이…』동장 황보림씨(48)의 말. 일제 때는 인근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신교육을 거부, 서당 공부만 시키다 후손들의 사회진출이 늦어진 결과가 됐다고도 했다. 임씨는 때로 왜 하필 선조가 이런 궁벽한 곳에 자리잡았는지 원망스런 생각도 없지 않다며 웃었다. 한가지 기이한 것은 6·25때 이 동네 청년들 수십 명이 군에 갔지만 단 한사람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조상의 음덕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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