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독일 집권 사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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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독일 집권 사민당(SPD)이 날개 없는 추락을 하고 있다. 당 지지도는 야당의 반 토막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내홍도 심하다. 복지 삭감 등 우파정책을 추진하는 당권파와 이를 비판하는 전통 좌파 간의 노선 투쟁이 불꽃을 튀긴다.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과의 관계도 삐걱거린다. 당 일각에서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지도력을 문제삼아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퇴출 직전의 사민당=당의 지지도가 바닥 수준이다. 이대로 선거를 치른다면 정권을 내줘야 할 판이다. 시사주간 슈피겔(6일자)에 따르면 현재 사민당은 28%, 기민.기사연합(CDU/CSU)은 48%, 녹색당.동맹 90은 9%, 자민당(FDP) 7% 수준이다.

기민.기사연합이 자민당과 손을 잡고 있어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민당은 독일 연방 16개 주 가운데 4개 주에서만 주 정부를 차지하고 있다. 1999년보다 7개 주가 줄었다. 주의회 대표자가 참여하는 독일 상원은 기민당이 장악하고 있다.

당원 수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슈뢰더 총리가 집권하던 98년 말 77만5000명이던 당원이 지난 3월에는 59만7540명으로 격감했다.

◆ 왜 이렇게 됐나=당 지도부가 밀어붙여온 경제.사회 개혁정책인 '어젠다 2010'에 유권자가 등을 돌린 탓이다. 실업자 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인 500만 명에 이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각종 복지제도를 줄이자 서민층의 저항이 거세졌다. 슈뢰더 총리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득했지만 살기가 어려워진 국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선 투쟁을 둘러싼 당내 집안싸움도 지지율 하락에 한몫 했다. 당내 좌파들은 당권파가 기업의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연금과 실업수당 등을 축소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조와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온 당의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이유에서다.

당권파의 밀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높다. 그 결과 5년간 당수를 지냈던 당의 원로 오스카 라퐁텐 전 재무장관까지 탈당을 선언했다. 그는 옛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과 새로 창당한 좌익 정당이 손잡을 경우 함께 슈뢰더에 맞서 싸우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 탈출구는 없나=지난달 22일 슈뢰더 총리와 뮌터페링 당수는 내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1년 앞당겨 치르자는 조기 총선을 제안했다. 가장 큰 연방주인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선거를 비롯, 최근 11차례의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한 데 따른 것이다.

슈뢰더는 "이번 선거 결과는 우리가 개혁정책을 계속할 정치적 근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조기 총선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내심으론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배수진을 친 셈이다. 어차피 내년까지 가더라도 상황이 좋아질 조짐은 없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당초 예상과 달리 1% 아래를 밑돌고 있다.

12%대의 실업률도 호전되지 않을 전망이다. 그럴 바에야 국가의 앞날을 위한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승부수를 띄우자는 것이 수뇌부의 생각이다. 그러나 조기 총선을 해도 현재 여론조사 결과로는 승산이 거의 없어 사민당은 집권 7년 만에 정권을 내놓아야 할 판이다. 조기 총선이 안 돼도 사민당 지도부는 더욱 궁지에 몰려 슈뢰더 총리에 대한 퇴진 압력은 한층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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