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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서 기어올라 일본 갑부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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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 7일 도쿄역이 내려다 보이는 ‘퍼시픽 센트리 플레이스’ 빌딩 28층 도쿄본사에서 한창우 회장이 일본 내 30대 갑부에 진입한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일본 빠찡꼬 업계의 선두주자 '마루한'의 도쿄(東京) 본사 회장실에는 한창우(韓昌祐.74) 회장이 훈장을 받는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 있다. 1999년 일 정부에서 받은 훈 3등 '서보장(瑞寶章)'이다. 일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교포는 이희건(李熙建) 신한은행 창립자와 한 회장 두 명뿐이라고 한다. 한 회장은 최근 또 하나의 '훈장'을 얻었다.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일본 내 24위에 오른 것이다. 일본에서 상위 30위 이내에 한국계 기업인이 들어간 것은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그룹 사장(8위)에 이어 두 번째다. 그의 순자산은 11억 달러(약 1조1000억원). 롯데 신격호 회장 일가의 순자산은 17억 달러,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순자산은 15억 달러다.

포브스지는 "그는 온갖 차별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액 1조3000억 엔(약 13조원)을 기록, 빠찡꼬 업계 1위를 차지한 불굴의 경영자"라며 "'마루한'의 쾌속질주는 계속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7일 도쿄 본사에서 한국 신문 기자와는 최초로 만난 한 회장은 "이번에는 일본 내 24위에 그쳤지만 내년에는 롯데를 제칠 수 있을 것"이라며 "2010년에는 매출 5조 엔을 기록해 한국.일본을 합해 5위 이내에 들어설 것"이라고 자신했다.

일본 굴지의 기업인으로 등극한 한 회장의 인생 역정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14세 때인 1945년 10월 21일 밤 11시. 그는 고향인 삼천포 앞바다에 섰다. 일본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던 친형의 부름을 받고 무작정 밀항선에 올라탔다. "5~6시간이면 갈 줄 알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더군요. 통통배가 파도에 흔들려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에서 도착한 곳이 바로 시모노세키였어요. 쌀 두 부대와 영어사전이 내 짐의 전부였습니다. 여관에 들어갔는데 누워 있어도 눈이 핑핑 돌아 다다미 바닥을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었죠."

이후 3년 동안 피나는 공부 끝에 그는 일본의 유명 사립대학인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해 한 회장 같은 한국인이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52년 당시 교토에서 열차로 4시간 거리인 미네야마(峰山)에서 기계 20대를 놓고 빠찡꼬 사업을 하던 매형에게 건너갔다. 빠찡꼬와의 첫 만남이었다.

매형 밑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67년 독자적으로 '볼링장'사업에 뛰어들었다. 볼링 붐이 불던 때였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전략으로 그는 41세 때인 72년 당시 60억 엔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1200억 엔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매일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아이들(7명.당시는 6명)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망설이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 속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떠오르더군요. 불굴의 의지로 고기잡이에 나선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젊은 내가 못할쏘냐'라는 투지가 일더군요."

그래서 그는 '본업'인 빠찡꼬로 돌아왔다.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그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목 좋은 점포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며 매장을 하나 둘 늘렸다. "빚 원금을 1년째는 매달 25만 엔, 2년째는 매달 50만 엔, 3년째는 매달 75만 엔꼴로 갚아 나갔습니다. 헝그리 정신과 도전 정신 하나로 버텼습니다. 때마침 운 좋게도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나 온갖 차별이 그를 괴롭혔다. 지역사회에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청년회의소(JC)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았다. "슬펐지만 차별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차별을 줄이기 위해선 지성과 교양을 늘리고 경제적 성공을 이루고, 그리고 지역사회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15시간 일했습니다." 95년에는 꿈에 그리던 '도쿄 입성'에 성공했고,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마루한은 현재 일본 전국에 180곳의 점포, 기계 10만 대의 최대 규모 빠찡꼬를 자랑한다. 종업원도 7000명에 이른다.

"세심한 배려 하나가 매출을 좌우합니다. 예컨대 그날 돈을 많이 날린 고객에게는 점장이 다가가 '참, 죄송하네요'라고 말을 걸면서 구슬을 조금 융통해 준다든지, 담배 한 갑을 서비스하는 식이죠. 또 매장에 담배냄새 제거시설을 설치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간이 샤워시설까지 갖춰놨습니다. 연인들을 위한 전용좌석도 마련했고요."

그는 빠찡꼬가 갖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흔히 빠찡꼬 하면 폭력조직, 그리고 '검은돈'을 연상하지요. 그래서 어느 초일류기업보다 더 투명하게 경영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모든 수입과 경비 등이 실시간으로 전산처리되도록 해 세무당국에서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마루한은 또 수익금의 1%를 지역사회 봉사에 내놓고 있다.

마루한은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 위해 현재 금융 당국과 협의 중이다. 하지만 상장 목적이 다른 회사와 다르다. "전 상장을 통해 돈을 벌거나 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루한의 상장은 투명한 회사임을 사회에 알리고 내가 일본에서 60년 동안 한 일에 대해 사회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겁니다."

'빠찡꼬왕'으로 불리는데 실제 빠찡꼬 실력은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그는 "빠찡꼬 인생 50년이지만 실제 해본 것은 10번도 안 되고, 그것도 기껏 1000엔 정도 해본 것"이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한 회장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는 모르나 돈 운용에 대해선 낙제점"이라며 "내 호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인 10억 엔에다 신용으로 5억 엔을 빌려 15억 엔어치 주식을 샀는데 지금 4억 엔이 되어버렸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주식투자는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 한 회장, 1만명 초청 '세계 최대 파티'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은 22일 도쿄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지바(千葉)현 마쿠하리(幕張) 메세 국제전시장에서 '깜짝 쇼'를 벌인다.

지난해 매출 1조 엔 돌파를 기념해 직원과 국내외 인사 7000~1만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기념파티를 열기로 한 것이다. 저녁 만찬으로 나오는 프랑스 요리를 나르는 종업원의 수만 1500명이다. 식사를 준비하는 뉴오타니 호텔의 인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프린스.셰러턴 호텔의 종업원까지 동원된다.

한 회장은 "연회장에 동시 입장이 불가능해 대연회장 3곳을 허물어 무대설비까지 꾸몄다"며 "한 자리에서 동시에 최대 인원이 식사를 하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와 공노명.김태지 전 주일 대사,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 등 양국의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그는 "일본에 건너와 60년 만에 이룬 꿈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술쇼.콘서트.디스코 파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이날 행사 비용은 총 15억 엔(150억원)으로 잡혀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 바로잡습니다

6월 9일자 11면 '빠찡꼬 왕 한창우 회장'기사의 그래픽에서 '호세인(法政)대학'은 '호세이 대학'을 잘못 쓴 것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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