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실패해선 안 될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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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는 워싱턴 분위기는 어떤 것인가. 부시 1기 정부 때 대북 온건파 국무장관 콜린 파월의 노력으로 유지되던 강온세력 간의 균형이 강경파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특징이다. 북한의 정권교체에 대한 집념도 건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이 미국의 선택지에서 사실상 슬그머니 빠진 인상을 주는 것은 한국과 중국의 완강한 반대입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북한은 미국에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6자회담에 나오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는 신호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정부는 북한이 시기를 명시해서 언제 6자회담에 나오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은 이상 긍정적인 해석을 유보하고 있다.

북한이 6자회담에 참가하는 것을 전제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과 그렇지 않은 경우와는 큰 차이가 있다. 북한의 6자회담 참석이 전제되지 않은 한.미 정상회담이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3등분해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내는 방안, 둘째는 재개된 6자회담에서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셋째는 6자회담이 재개되지 않고 북한이 핵무장을 강행할 경우 취할 대응조치다. 북한의 6자회담 참가가 결정되면 이 세 가지 중에서 첫번째 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핵협상의 큰 틀을 의논하면 된다.

일부 희망적인 보도대로 북한이 6자회담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면 한국의 보수파와 진보파, 미국의 강경파와 온건파는 그 배경을 서로 상반되게 해석할 것이다. 한국의 보수진영과 미국의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딕 체니 부통령 같은 사람들의 대북 강경발언과 스텔스 전폭기의 한국 배치와 북한에 가 있던 유해발군단의 철수 같은 대북압박이 북한으로 하여금 꼬리를 내리게 만들었다고 해석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세력과 미국의 온건파는 북한을 6자회담에 다시 나오게 한 요인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강력한 압력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 같은 사람들의 외교 노력에서 찾을 것이다.

앞에 소개한 워싱턴의 분위기 때문에 부시를 만나러 가는 노 대통령의 발걸음은 무거울 것이다. 파월이 떠난 빈자리가 참으로 크게 느껴진다. 부시가 김정일 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이라고 부를 때 체니 부통령은 김정일을 제 국민을 굶기는 무책임한 지도자라고 공격하여 혼란을 가중시킨다. 남한도 혼란스럽고 북한도 혼란스럽다.

노 대통령에게는 국내 사정도 가혹하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참여정부의 개혁법안은 물타기 되거나 폐기될 운명이고 행담도 프로젝트와 러시아 유전개발 스캔들은 여당 내부의 자중지란뿐 아니라 당.정.청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한반도 안정의 장래가 달린 중요한 회의를 하러 떠나는 노 대통령을 거국적인 박수로 보내주는 나라 형편이 아니다. 마치 단기필마로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 같은 모습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핵과 한.미동맹이 정상회담의 양대 의제다. 순서상으로 한.미동맹이 먼저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 간 오해와 갈등을 부른 이슈를 해소하고 한.미동맹의 강화에 합의한 뒤가 아니면 북핵에 관한 만족스러운 공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정상회담에 앞서 균형자론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정리한 것은 다행이다.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가 기자들에게 설명한 대로 두 대통령은 한국의 동북아 비전과 미국의 글로벌 비전을 놓고 서로 공유할 공간을 논의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회담 결과에 걸린 문제들을 생각하면 노 대통령에게는 협상에 실패할 여유가 없다. 동맹 문제에서 미국의 입장을 수용하고 북핵에서 양보를 받아내야 한다. 회담은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가령 처음 10분 내지 15분 동안에 이라크의 민정출범을 평가해 주고 이라크 재건과 안정에 한국이 적극 협력할 것임을 천명하면 분위기는 부드러워질 것이다. 그런 다음 전쟁 반대를 대전제로 한 북핵 해결방안을 끌어내야 할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