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고『나의 의지』…단행본 출간 앞서 본지독점게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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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다트」전이집트 대통령은 지난해 l0월6일 암살당하기 전인 그해 3월부터 관영 주간지 『마요』에 자신의 회고록을 연재했다. 이 회고록은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중단됐으나 그 당시 녹음해둔 나머지 내용과 발표분을 묶어 『나의 의지』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곧 출판될 예정이다. 본사는 영어와 아랍어판의 출에 앞서 이 회고록의 한국어독점게재권을 획득, 오늘부터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

<무단전재 금지>
소련의 독재자 「흐루시초프」공산당 제1서기와 나는 첫대면하는 순간부터 반발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1960년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원조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이집트 국회대표단장으로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흐루시초프」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게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회의 도중 「흐루시초프」는 주제가 된 병기제공문제를 벗어나 갑자기 공산주의이론을 펴기 시작해 공산주의의 성과와 불가피성을 떠벌림으로써 우리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흐루시초프」는 마치 위대한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사회주의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우리나라는 사회주의를 택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흐루시초프」는 『당신들 나라의 사회주의는 콩이고 우리나라의 공산주의는 시시캐팝 (양고기요리)이다. 당신들도 콤과 시시캐팝의 엄청난 차이쯤은 알 것』이라고 말했다.
「흐루시초프」는 난폭하고 품위없는 말을 잘 지낄여대면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나라들에 대해 심한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다. 이러한 그의 인간성에 나는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흐루시초프」역시 나를 싫어하고 있었다.
64년5월 「흐루시초프」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나는 가능한한 그의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려 애썼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의 「흐루시초프」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고라도 이 남자가 소련의 권력이양제도를 더욱 성숙시키려 노력해온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공식회담석상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언동이나 권력, 직권남용등에 대해 여러 번이나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흐루시초프」의 이야기로는「스탈린」은 밤마다 측근전원을 자신의 아파트에 불러 들여 의식을 잃을 때까지 보트카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한밤이 지새도록 그의 눈앞에서 춤을 추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티에서 참석자의 얼굴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매일밤 참석자는 그들 중의 한사람 내지 두사람이 사라져버렸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동료의 신변변화를 이상히 여기는 눈치를 조금이라도 보이는 용기 있는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흐루시초프」도 「스탈린」이 베푸는 보트카와 댄스파티에 불려갈 때마다 부인에게 『안녕』이라는 고별인사를 했었다고 밝혔다.
「 스탈린」 측근의 지위를 오랫동안 지켜온 유일한 인물이 바로 전수상「코시긴」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후「흐루시초프」는 사람들 앞에서 「코시긴」에게 『「스탈린」과 13개월이상 함께 지내온 사람은 한명도 없는데 자네는 어떻게 13년간이나 지낼 수 있었는가』고 야유를 퍼부었다.
이런 식의 농담이 「코시긴」을 반「흐루시초프」로 돌아서게 하여 「흐루시초프」타도의 음모를 지지케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 「흐루시초프」가 소련에서 권력이양을 더욱 질서있게 하고, 강한자의 음모에 의한 권력탈취를 막는 정권교대제도룰 확립하려 했다는데 대하여는 찬사를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음모에 의한 권력탈취가 계속되고 있다.
「흐루시초프」 는 숨김이 없는 노골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들에게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흐루시초프」는「스탈린」사후의 새 지도부가 어떻게 비밀경찰의 총두목인「베리야」의 숙청에 성공했는가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베리야」는 비밀촬영사진이나 녹음테이프를 사용, 소련지도부 전원의 비행을 입증할만한 증거자료를 모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흐루시초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베리야」를 체포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의 눈은 모든 곳에 번득였고 스파이가 각 개인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결국 중앙위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아무렇지도 않은듯 보통때와 같이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베리야」는 간부회원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간부회원들이 테이블주위에 둘러앉자 등뒤의 도어가 닫혀졌다. 신호에 따라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베리야」가 앉아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전원이「베리야」의 목을 죽을 때까지 졸라댔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해낸「베리야」 숙청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흐루시초프} 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흐루시초프」는 우리들을 보고 『 「이집트의 배리야」를 제거하는 데도 같은 방법이 응용될수 있겠지』라고 말했다.
「흐루시초프」가 「이집트의 베리야」라고 한 것은 우리들의 동료인「자카리야·모헤딘」 내상을 지침하는 말이었다. 「모헤딘」은 이집트의 공산수의자를 추적, 체포하거나 그행동을 엄중히 감시하는 책임자였다.「흐루시초프」는 「모헤딘」을 미국의 스파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혁명군사평의회를 열어 회의도중 우리들전원이 「모헤딘」의 목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졸라야 한다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71년 내가 소련의 조종을 받는 이집트국내의 권력자들을 일소했을 때(「알리·사부리」부수상등의 체포·추방을 말함)나는 그들이 이미「베리야」살해의 기술을 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64년10월 「낫세르」이집트대통령의 사저응접실엔 「티토」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초대 돼 있었다. 응넙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놀라운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낫세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티토」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라이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뉴스는 소련공산당간부회(66년 정치국으로 개칭)멤버가운데 단 한사람「니키타·흐루시초프」제1서기의 초상이 모스크바의 모든 벽에서 모습을 감췄음을 알렸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가 갑자기 소집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제1서기인「흐루시초프」는 흑해연안에서 휴양중이라는 것과 이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흐루시초프」는 10윌l4일의 중앙위원회에는 참석했는데 이 때 이미 해임의 사전교섭이 끝나있었다).
뉴스는 마지막으로 「흐루시초프」가 모든 지위에서 해임됐으며,「브레즈네프」를 당제1서기, 「코시긴」을 수상, 「미코얀」을 최고회의간부회의의장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정권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
「흐루시초프」는 불과 몇달전에 이닙트를 친선방문하여 소련제 최신무기의 대이집트판매와 이집트에 대한 경제원조협정을 맺은바있으므로 이 뉴스는「낫세르」를 불안에 빠뜨렸다.
나는 내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변극의 공로자가 바로 내친구이며 국가통제위원회의장인 「알렉산드르·셀레핀」 (주 참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나와「흐루시초프」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가.
「낫세르」는 「흐루시초프」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키로 했다. 이집트의 보도기관은 모스크바의 새 체제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켐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모스크바의 새 지도체제가 사태를 우려, 「셀레핀」을 카이로에 파견하기 까지 계속됐다.
카이로체재중의 어느날 밤「셀레핀」은 당시 이집트군총사령관 「압델·하킵·아델」이 베푼 만찬에 모습을 나타냈다.
『「흐루시초프」에게 그 같은 처사를 취한 것은 왜인가. 우리들에게 얘기해주지 않겠는가』우리들은 「셀레핀」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셀례핀」은 반대로 질문을 되돌려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우선 내게 이야기해 주시오. 최근「흐루시초프」가 애스원에서 이라크의 「압델·사렘·아레프」대통령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읍니까?』
실제 「흐루시초프」는 몇번이나 「아레프」를 헐뜯으면서 야비한 말을 있는대로 지껄여 이라크지도자를 욕되게 했다. 그런데 이 격한 설왕설래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그것을 어찌 이 친구가 안단 말인가. 따라서 우리들은 「셀레핀」의 이 같은 질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사건을 모스크바가 알게되어, 소련지도부는 이를 하나의 큰 구실로 삼아「흐루시츠프」 타도를 결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대의 이유는 소련지도부가 「흐루시츠프」에 대한 이집트국민의 일방적 환영에 큰 공포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흐루시초프」는 그 자신이 꿈꾸지도 못했을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에 경계심을 느낀 모스크바의 지도부는 「흐루시초프」가 세계적 영웅이라는 평판을 이용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전광석화와 같은 해임극을 연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흐루시초프」의 이집트방문은 애스원댐의 제l단계공사완료에 따라 나일강의 물을 운하로 흘려보내는 역사적인 기념식전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이 끝나자 「흐루시초프」는 조용히「아례프」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흐루시초프」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때 받았던 저 건설적인 환영을 계기로 그의 오만함은 한층 심해진 것 같았다.
「낫세르」와 「아멜」은 「흐루시초프」가 호통을 치는데 끼여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이렇게 해서 축하식전은 표면적으로는 별 파란없이 막을 내렸다.
다음에 우리들은 홍해연안의 베레나이세로 날아갔다. 거기에는 요트 시리아호가 정박해있으므로 낚시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요트위의 정치회담석상에서 「흐루시초프」는 돌연 무어라고 말한 것도 없는데 또「아레프」를 몰아 붙이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어 우리들의 간을 서늘케 했다.
▲주=「알렉산드르·셀레핀」소련지도부내의 수완가로서 국가보안위원회의장(58∼61년)을 지내고 「브례즈네프」정권 발족당시에는 당간부회원 (후에 정치국원으로 개칭)·서기·부수상을 겸임했는데 65년 부수상, 67년서기, 75년 정치국원에서 차례로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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