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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회 동양화부서 특선은 허백련·심인섭등 4명|중기부턴 운보·정말조등 신예들이 각축|한국인으론 청전이 10번 특선…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제1회「조선미술전람회」는 22년6월1일부터 서울영악정(지금저동)에 있는 상품진열관에서 열렸다.
이때는 김용진 현채 이한복 오세창 최린 안종원 고희동 심인섭 지운영 여수현 변관유 이상범 허백련 김은호 이용우 나혜석등 유명한 서화가들이 출품했다. 이때 심사위원은 동경에서 건너온 일본화가 세사람과 이완용 박영효 박기양 이도영 서병오 김돈희 정대유 김규진이 참여했다.
이때 동양화부 1등상은 없었고, 2등상은 허백련의『추경산수』, 3등상은 심인섭의『묵죽』, 4등상은 김은호의『미인백무강』·이용우의『고성춘심』이 차지했다.
이것이 1회「선전」에서 한국인이 얻은 특선작이다.
3·1운동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3년이나 옥고를 치른 오세창(전서)은 서부에서 2응상을 받았고, 최린(난)은 동양화부에서 입선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무번사 참고품을낸 서화가는 이도영(석굴수서)·김규진(묵죽·글씨)·김돈희(글씨)·정대유(글씨)등이다.
나는 비교적 질서가 잡힌 중기부터 선전에 참여, 젊은 작가들과 겨뤘다.
나보다 먼저 동양화부에서 연4회 특선으로 선전추전작가가 된 사람은 운보(김기창)와 정말조뿐이다.
운보는 나와 함께 이당문하에서 그림공부한 동문. 선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때면 서로 화실을 오가면서 보고 격려하던 사이다 .정말조는 경도회화전문학교를 나온 화학도인데 경도에 살고있어서인지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더잘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선전에 출품할때면 한국에 나왔다. 서울에 오면 으례 일본인으로 선전에 심사참여한 송전정웅의 집에 유했다. 나도 그와 몇번 만난일이 있지만 우리말을 떠듬떠듬해서 퍽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일본화가로 동양화부에서 우리와 경쟁을 벌인 호적수들은 천촌헌방·강구경사낭·전중문자·금전경일랑등이다.
천촌헌방은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시장풍경이나 엿목판을 짊어지고 가위치는 모습등 익살스런 표정을 살린 재미있는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금전경일랑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인데 관리생활을 했다. 전중문자는 인물·꽃등을 즐겨 그렸다. 유일한 여류화가였는데 총독부관리의 딸이어서인지 선전에서 몇번이나 특선을 따냈다.
우리와 경쟁들 벌인 이사람들은 거의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선전에서 가장 특선을 많이한 화가는 청전(이상범)이다.
그는 작품을 내기만 하면 특선에 올라 10번특선기록을 깨뜨렸다. 당시에는 2점도 낼수 있어 출품작이 모두 특선하는 일도 있었다.
추천작가는 되지 못했지만 선전에서 특선을 따낸 동양화가는 책계(정종여)제당(배렴)현초 (이유태)심원(조중현)고암(이응노)남농(허건)등이다.
나와 후소회동문인 현초는 43년 22회 선전서 총독상을, 44년 23회 선전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심원도42년 21회 선전서 초특선, 44년 23회 선전서는 차석상인 총독상을 따냈다.
서양화가로 선전관문을 통과한 추천작가로는 이인성·심형구·김인승·박영선등이있다.
이인성은 선전에 대담한 작품을 내 주목의 대상이되었고 심형구·김인승은 동경미술학교를나온 신예작가로 각광을 받았다. 침마김중현은 동양화·서양화를 넘나들며 특선을 따냈다.
이마동·김종태·박득순·김흥수등도 일인화가를 제치고 선전에서 특선을 따낸 맹장들이다.
김종태는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청색옷을 입은 여인을 파이프의자에 앉힌 참신한 그림을 그려 화제가되기도 했다.
조각부에서도 한국인 조각가들이 실력을 과시했다. 윤효중·김경승·조규봉·윤승욱등이 특선작가다.
늦게 생긴 공예부에서는 김재석·강백원 이세영등이 특선을 따냈다.
참고로 내가 선전최고상인 창덕궁상을 타던 42년 21회 선전의 수상작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9명이 상을 받았는데 제1부 동양화부에선 내가 창덕궁상, 정말조가 총독상, 전중문자가 총독을믈 받았다.
제2부 서양화에선 양진장일이 창덕궁상, 박영선이 총독상, 유강정자가 총독상을 따냈다.
제3부 조소(조소)는 창덕궁상이 없고 김경승이 총독상을 받았다.
같은3부 공예에선 뇌미효정이 창덕궁상, 일리십랑이 총독상을 획득했다.
9명의 수상자중 한국인은 4명뿐이었다. 선전에서는 때에따라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1부(동양화)·2부(서양화)·3부(조소·공예)로 나누어 부마다 최고상(창덕궁상)1명, 차석상(총독상)2명씩을 뽑았다. 그러나 해당작품이 없을때는 상을 주지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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