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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분담」은 정부가 솔선수범해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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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옥조<정치부차장>지난2월에 이어 만10개월만에 현민 유진오박사를 서울이태원동자택으로 다시 찾았다. 75세의 고령에도 형안이 젊음을 느끼게 했다. 지난 2월 제5공화국에 거는 기대와 새정부의 이상등에 대해 의견을 들은데 이어 이번에는 새공화국의 1년을 마감하는 여러문제와 박사의 근황등을 얘기들었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어떻게 소일하십니까. 건강은 어떠십니까.
『건강한 편이죠. 하루 몇십분이라도 산책을 하고픈데 날씨도 춥고 길이 미끄러워 나다니질 못해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얘기를 나누거나 하지 않으면 주로 책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읍니다.』
고희를 훨씬 넘긴 노령에도 독서가 일상이라는 유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책읽기를 권한다. 『사람은 평생을 두고 배워야합니다. 요즘 자주 쓰이는 평생교육이라는 말을 그런 뜻에서좋아하죠. 다만 일생동안 남에게서 가르침을 받는것만을 평생교육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건 잘못된 것입니다.』
-시설이나 제도를 통한 교육만을 중연하는 경향말씀입니까. 『그렇죠. 나는 그런 교육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남이 특별한 목적없이 한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수 있읍니까.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수많은 타인과의 회우를 만들어 주는 것이되는거죠. 꼭 학교와 같이 선생님이 있어서 그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으로부터라도 느끼고 배우는 자세의 진지함이 바로 교육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박사님같은 분이 좋은 글을 많이 써주셔야죠.
『글쓰는 것이 술·담배보다 건강에 더 나쁘다는 의사의 충고도 있고 해서 팔 쓰지않습니다. 벌써 오래됐죠.』
화제를 바꾸겠읍니다. 제5공화국의 첫해도 저물어 갑니다. 출범 첫해의 여러과장을 보고 느끼신 바를 듣고싶습니다. 『정부가 어떤 문제에 접할때 일방적·강압적인 것보다 넓은 범위의 국민적 합의(consensus)와 지지위에서 일하려는 노력은 느낄수 있읍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정당이나 국회를 어떤 식으로 끌고가려하는지 분명치 않은것같아요. 정당만 하더라도 법에 어긋나거나, 정도가 지나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수단을 통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하여 정권획득이라는 정당의 본령이 인정을 받지못해서도 안되겠죠.』
-새시대 새질서란 말이 그동안 고창되었읍니다. 이「새로움」의 내포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어라 하시겠읍니까.
『생각해보지 않아 당장 대답하기는 곤란하군요. 말을 바꾸어 새정부가 들어서서 가장잘하는 일을 묻는다면 사회정화운동이라 생각합니다. 동사무소나 파출소같은 곳에 가볼 기회가 없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알수없지만 공무원세계의 기강을 바로잡아놓겠다는 방향설정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고위간부 몇명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공무원 세계의 밑바닥까지 깨끗한 풍토를 조성하겠다는 결의는 과거 같으면 거의 불가능시 돼온거죠. 「사정」이라는 말을 만든 나로서는 관심이 크지 않을수없읍니다.』
-그말이 언제부터 쓰여진 말입니까.
『48년 정부수립직후 이승만박사를 도와 독립운동을 하던 동창 1명이 이박사로 부터 지금의 정보기관같은걸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받고 당시 법제처장인 나에게 협조를 구하기에 법을 다루는 사법보다 광의의「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사정」이라는 용어를 썼고, 그 기관을 사정국으로 명명했죠.』
-그렇다면 지금은 사정이란용어가 원래의 취지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칸트」가「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 하지 않았읍니까. 사회질서가 법만으로는 바로잡히는게 아닙니다. 사정당국이 법률뿐만 아니라 도덕·전통·인습등 사회규범전체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당초 내의도와 일치합니다.』
-눈에띄는 성과라도 있읍니까.
『그게 일조일석에 성과가 나타날 성질의 것입니까. 겨우 그방향으로 돌아선걸 느낀다는 정도죠. 꾸준히 노력해야죠.
부정·비리는 어디를가나 다있읍니다. 후진국일수록 심한편이지만 선진국에서도 별경험을한적이 많죠. 택시운전사에 속은일, 바가지 쓴일 같은것 말입니다.』
-올해 정부가 한 일가운데 정부기구축소를 빼놓을수없는데….
『만사가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어럽죠.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봅니다. 경제가 심각한난관에 봉착하고 있는데 고통을 분담하는데 정부가 솔선수범해야죠. 민간에게만 아끼라고 하는것은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공공요금인상은 제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이론이 있을수 있죠.』
-정부와 민정당사이에 당우위론이 할발히 논의되고 있는것같습니다.
『정당정치의 대원칙상 의당 그렇게 돼야겠죠. 정부가 민정당의 기초위에서 있다면 말입니다.』
-야당에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당이란것은 국민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으면 정권을 잡는다는 대전제가 흔들려서도 안되고 포기돼서도 안됩니다.』
-기업들이 활동하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경제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공허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맹목적인 급진적 팽창정책은 잘못이었죠.
긴축·저축을 통한 지금의 안정성장정책은 옳은 방향인 것같습니다. 기업이 곤란을 받겠지만 극복해야겠지요. 다만 기업이 도산하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그냥 내버려 둘수만도 없다는데 정부의 어려움이 있을것 같군요.』
-지난2월 봤을 때 우리경제의 과제의 하나로 국민의 기업관과 기업의 윤리관 확립을 말씀하셨는데요….
『다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 기업인의 인식이 아직 상업자본주의의 역에서 벗어나지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의 기업중에는 기업이 아니라 모리도 허다했죠.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잘산다」는 말도 들리는데, 있을 법이나 한얘기입니까. 기업의 사회성과 공공성이 어느때보다 강조돼야겠읍니다.』
-88년올림픽·86년아시안게임의 서울유치는 무척 놀라운뉴스였죠.
『우리 형편으로는 무척 무리한 일이죠. 어려운 일을 맡아놓은거죠. 그러나 결정된이상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허욕을 내서는 안됩니다.
또 허욕을 부릴수도 없는 형편 아닙니까. 우리형편에 맞게 일을 치러야 되겠죠. 잘 되기를 바랍니다.
재작년 일본 동경에 가봤더니 일비곡가등 중심가에 과거에 없던 고층건물이 즐비했고 고가도로가 거미줄같이 쳐져있더군요. 그게 다 64년 올림픽때부터 건설된것이란 얘기를 들었지요. 잘하면 좋은 점도 많을것 같아요.』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이젠 계통적인 독서는 못하고 있읍니다. 최근엔 캐나다 터론토대학의「맥퍼슨」교수가 쓴 민주주의론(Democratic Theory)을 읽었죠. 흥미를 끌만한 내용이 아니었읍니다.』
-신앙은 갖게 되셨는지오.
『두눈을 딱 감고 절벽에서 일단 뛰어내려야하는데 그게안됩니다.』
-새해에는 어떤 설계이십니까.
『이렇다할 새로운 설계는 없어요. 그렇게 그렇게 살아 가는 겁니다. 가급적 좋은 일을 순리에 따라 해나가는데서 즐거움을 느끼려고 애씁니다. 그냥오래 사는 일이 반드시 좋은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노자는 수칙다계이라 하지 않았읍니까. 일리 있는 얘깁니다. 사는데까지 열심히 살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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