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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주식시세표 56년째 정독 … ‘삼보’는 아직도 가슴 뛰는 단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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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08면

강성진 전 회장은 1927년 충남 예산 출생. 경성상고를 졸업한 뒤 동아건설에 입사해 경리부장을 지냈다. 58년 동아건설이 인수한 동명증권 상무이사로 증권업에 몸을 담았다. 이후 영화증권을 거쳐 64년부터 83년까지 삼보증권을 경영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대한증권업협회장, B&G증권 명예회장을 지낸 뒤 2013년 은퇴했다.

꼭 증시 투자자가 아니어도 경제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막혀 할 이야기 한 토막.

한국 증시 산 역사,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

1964년 3월 27일, 증권거래소는 보유 중이던 한증권(韓證券·한국증권거래소 출자 증권)과 증금주(證金株·증권금융회사 주식)를 매각했다. 거래소 직원들에게 월급 줄 돈이 부족해지자 현금 확보를 위해 취한 조치였다. 주가 하락세를 지켜보던 투자자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자 거래소에 투자자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 시위로) 온 나라가 비상사태에 빠져 주가가 연일 떨어지고 있는데 거래소마저 대규모 매물을 내놔 폭락을 부채질한다”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증권거래소 이사장실에 난입해 집기와 기물들을 부숴버렸다. 결국 송대순 당시 증권업협회장이 단상에 올라가 “내가 책임지고 한증권과 증금주를 반대매매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러고 나서 사상 초유의 ‘증권 야시장(夜市場)’이 열렸다. 야간에 주식시장을 연 것이다. 거래소는 정규시간에 판 주식을 야시장에서 반대매매로 다시 사들였다. 그제야 투자자들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날 객장 한쪽에서는 37세의 젊은 증권사 경영자가 소동의 전말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달 초 삼보증권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강성진 사장이다. 그는 64년 삼보증권을 인수한 뒤 19년간 업계 선두를 지키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엔 증권업협회장을 지낸 ‘증권 대부(代父)’이자 한국 증시의 산증인이다.

강 전 회장은 “50년 전, 그러니까 한국 경제가 부흥의 기지개를 막 켜려던 시절엔 증시 운영 경험이 부족하고 제도도 미비해 시장 운영이 이처럼 파행적이었다”며 “그날 나는 증권사 경영자로서 앞으로의 삶이 평탄할 수 없을 것을 예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오는 20일 자신이 반세기 동안 겪은 증권가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증권 반세기 강성진 회고록’을 출간할 예정이다. 여의도 63빌딩에서 미수(88세)연을 겸해 열리는 출간회는 (사)함께하는 경제 배창모 회장, 명호근 삼보증권 동우회장, 장남 강완구 일동여행사 회장, 차남 강흥구 (사)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사위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함께 주관한다.

경제기사 매일 아침 꼼꼼히 챙겨 읽어
중앙SUNDAY는 지난 8일 강 전 회장이 사무실 겸 접견실로 쓰는 서울 도곡동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미수의 강 전 회장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취재진을 맞았다. 테이블 한쪽에는 주요 일간지와 경제신문이 쌓여 있었다. 동석한 차남 강흥구 이사장은 “아버님은 지금도 매일 경제기사를 챙겨 보신다. 단 하루도 주식시세표를 꼼꼼히 훑어 보지 않는 날이 없다”고 귀띔했다.

강 전 회장은 답변이 길어질 땐 잠시 쉬면서 숨을 가다듬으면서도 구체적인 수치를 나열하며 한국 증시 발전사를 풀어놨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60년대 한국 증시는 한마디로 ‘좌판 수준’이었다. 객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휴장했고 증권사들 사이엔 ‘책동전’(주식 시세를 조정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이름의 투기 광풍이 불었다. 서울 증권거래소가 개설된 지 8년이 지난 64년까지도 상장회사는 5개, 시중은행까지 포함해야 모두 15개에 불과했다. 56년 거래소 개설 당시 증권업협회 추천으로 상장된 회사가 16개였으니 ‘주식시장을 통한 산업자금 조달’이라는 증시의 목적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던 때였다. 그나마 순수한 민간기업은 경성방직과 유한양행 등 5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회사들의 주식은 대부분 정부가 보유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통주식 수가 비교적 많고 주식 분산도 제대로 돼 있는 한증권과 증금주에 거래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증금주는 6개월 사이 300배가 오르기도 했다. 한전주와 미창주(米倉株·미곡창고 주식), 해공주(海公株·해운공사 주식)도 갑자기 10배 이상 급등하곤 했다. 오를 땐 탈이 없었지만 주가 급락 땐 투자자들의 시위가 잇따랐고 그럴 때마다 증시는 문을 닫았다. 그는 “주식시장이 경제의 바로미터라고 하지만 그건 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의 일”이라며 “60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 65년이 돼서야 105달러를 기록했을 정도니 증권시장이 제대로 돌아가기에는 기본동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삼보증권 1년 만에 업계 1위 돌풍
한국 증시는 70~80년대는 도약기를 맞았다. 68년 1월 ‘자본시장육성법’이 만들어지면서 기업공개가 줄을 이었다. 72년에는 사채 동결 조치라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긴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이 발표됐다. 기업이 안고 있는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기업은 신고했으나 사채업자가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 돈을 갚지 않아도 됐다. 이때 신고된 사채는 출자전환 시켰는데 그 규모가 3555억원에 달했다. 사채 동결로 갈 곳을 잃은 자금이 증시로 몰리면서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같은 해 12월 ‘기업공개촉진법’이 이어지면서 발행시장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강 전 회장은 “증시가 발전하지 않으면 72년 시작될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메시지가 선명했다”며 “증권업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걸 직감하고 당시 경영 5년째 접어들던 삼보증권을 대형 회사로 키울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삼보증권은 83년 대우그룹 계열사이던 동양증권과 합병(합병 회사는 이후 대우증권이 된다)될 때까지 증권업계에서 각종 ‘최초’ 기록을 잇따라 세웠다. 단순히 거래 규모만 1위였던 게 아니라 최신 경영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72년 증권업계 최초로 신입사원 공채를 하고 직원 급여를 두 배로 올렸다. 기획조사부를 처음 만들어 시장과 기업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시작하는가 하면 전국 지점망을 갖췄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미국 경영대학원(MBA) 출신과 공인회계사들을 채용하고 국제부를 신설해 해외 진출 준비도 했다. 국내사 최초로 ‘사무라이 본드’ 국제 공동인수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나가던 삼보증권은 직원이 돈에 손을 대는 ‘창구 사고’가 ‘시재금 부족 사태’로 비화하면서 합병의 운명을 맞게 된다. 당시에는 금융기관의 창구 사고가 빈발하던 시절이어서 삼보증권의 운명을 놓고 ‘정권 기획설(說)’도 나왔다. 강 전 회장은 “앞만 보고 달리면서 내부 단속을 소홀히 했던 내 탓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며 “청춘을 바친 회사여서 지금도 ‘삼보’라는 단어만 들으면 가슴이 마구 뛴다”고 했다.

1989년 11월 주가 하락에 분노한 투자자들이 증권시세 전광판 불을 끄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위). 90년 5월 증권시장 안정기금 현판을 거는 강 전 회장(왼쪽)과 배창모 증권업협회 부회장. [사진 금융투자협회]

가장 보람된 일은 증안기금 설립
그는 ‘증권 인생’ 가운데 가장 잘한 일로 증시안정기금 설립을 꼽았다. 증시안정기금은 증시가 급락할 경우 이를 막는 데 쓸 공공기금이다. 배경은 이렇다. 89년 3월 31일 사상 처음 종합주가지수 1000을 돌파한 증시가 불과 1년 사이 3분의 2토막이 났다. 3저(금리·환율·유가) 호황을 구가했던 경기가 가파르게 내리막을 타고 있었고 부동산 투기로 시중자금이 온통 아파트 청약과 땅 사재기에 쏠렸다. 기업공개가 잇따르면서 주식시장엔 ‘공급’이 넘쳐났다. 지수가 600 중반대까지 밀리던 90년 3월 말 그는 증권업협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증권회사 사장들을 상대로 기금 필요성 설득에 나섰다. 25개 증권사로부터 모두 2조원 출연을 약속받았다. 이어 은행과 보험회사, 주요 상장기업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마침내 4조원의 돈이 모아졌고 5월 4일 세계적으로 사례가 흔치 않은 민간 주도의 증권시장안정기금이 만들어졌다. 당시 주식시장 시가 총액이 90조원이 안 되던 시절, 이 기금은 고비 때마다 주가 하락을 방어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한국 증시 역사의 주요 사건을 들은 뒤 남는 궁금증 몇 가지를 물었다. 짧은 답변에도 ‘증시 고수’의 투자 철학, 경제를 보는 안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금도 주식 투자를 하시나요.
“90년 증권업협회장에 취임하면서 손을 뗐습니다.”

-개미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주가는 천장 3일, 바닥 100일입니다. 일확천금 기대는 금물이지요. 은행 정기예금이나 채권보다 조금 더 이익이 나는 정도의 목표를 세우고 투자해야 합니다. 여유자금으로 하되 기업실적, 주가수익비율(PER) 같은 건전성 지표를 따질 실력을 개인도 갖춰야 합니다.”

-요즘 증시는 글로벌 자본의 놀이터가 됐습니다.
“글로벌화는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다만 달라진 환경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외국인 투자가 없을 때 만들어 둔 증시 정책으로 외국인들이 30%나 차지한 시장을 다스리는 데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규제 개혁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부의 모든 정책은 ‘절대 하지 말라’가 아니라 ‘뭐든 하되 잘못될 경우엔 페널티를 세게 주겠다’는 방식의 규제라야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내수 경기 침체가 심각합니다.
“증시가 활성화되면 소비도 살아납니다. 증시가 활성화되면 부동산 투자로 옮겨 붙지요. 집도 사고 콘도 회원권도 사는 겁니다. 건설 경기 살리는 데만 관심 둘 게 아니라 증시 활성화가 경기 선순환의 출발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증권시장이 위기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인재들이 증시를 떠났어요. 기업 간 합병 같은 큰 딜을 외국 회사들이 도맡고 있어요. 국내 증권사들이 실력도 없고 데이터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경영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겪게 됩니다.”

-현직 증권사 CEO라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삼보증권 시절 전국 지점망 구축을 내가 선도했어요. 지금은 당시와 반대 상황입니다. 인터넷 시대가 왔어요. 일부 주요 지점만 남기고 과감하게 폐점하는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력을 영업이든 신상품 개발이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업무로 돌려야 해요.”

-한국 증시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증권사들이 협회를 중심으로 자주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각 사가 해야 할 일, 정부에 건의할 내용 등을 꼼꼼히 검토해야 해요. 정부도 증시 활성화에 대한 관심을 더 가졌으면 합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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