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대통령의 말, 노동운동가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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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동자.빈민을 위한 대통령을 표방해 당선된 뒤 기업가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며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다던데."

"…당연하지 않은가. '노조 지도자 룰라'는 노동자들만 대변했지만, '대통령 룰라'는 1억8000만 브라질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한다. 브라질 대통령이 어떻게 노조 지도자와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는가."

지난주 정부혁신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던 브라질의 루이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독자들은 마침 가려운 데를 긁어준 것처럼 시원하게 느낄지 모르겠다. 언뜻 지당하게 들리는 말씀에 이렇게 토를 다는 것은 세계가 모두 이처럼 순진하지는 않거나, 토가 필요할 만큼 지당하지는 않기 때문인가. 우선 당선 뒤의 새 지지자들한테는 노조 지도자의 말이 대통령의 말로 변해야 다행이겠지만, 노조 출신의 대통령 후보를 찍은 유권자들한테는 그 말의 변화가 약속 파기로 비칠 것이다.

이 후자 성향의 그룹에 과거 '종속이론가'로서 현재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사회학자 제임스 페트라스가 꼽힐 만하다. 그는 지난 25년간, 특히 2003년 집권 이전 "과거의 정책은 현재 룰라 정부의 정책 및 미래의 주요 계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 브라질 내외의 룰라 지지자들은 이 사실에 대해 제대로 주목하지 않으면서 예전에 만들어진 선입견을 가진 채 새 정부에 깊숙한 열망을 투사하면서 과도하고 비이성적인 환호를 보내고 있으며…"라고 쓰디쓴 실망을 표했다. 개혁 구호를 선점하기 위해 냄새 나는 '난닝구'와 '빽바지'까지 들춰내는 판이니 더 이상 무슨 선입견이 필요하랴. "빈민 출신의 진보주의자로 출발해서 부자이자 반동주의자로 끝난 대통령의 예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고 페트라스는 브라질 상황에 한 방 날렸다.

이 포럼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부패 없는 투명 사회는 획기적으로 진전돼 이제 더 이상 정경유착은 없다"고 선언했다. 앞으로의 성과야 두고 봐야겠지만 러시아 유전 비리, 행담도 개발 의혹, 청와대 월권 논란 등이 계속 터져 나오는 판국이라 국민이 듣기에 크게 민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국가적 비리'들은 내용이 달라졌을 뿐이다. 정경유착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으나, 사기업 대신 공기업이 총대를 메고 '권력 실세'가 나섬으로써 일종의 '국책적 비리'로 심화된 것이다. 사기업보다 그래도 어수룩한 데가 공기업이며, 그래서 돈도 공돈으로(?) 보이고.

역설적이지만 사회의 개혁 분위기도 한몫 거들었다. 이렇게 해도 터지고, 저렇게 해도 터진다면 사기업으로서는 안 내고 터지는 쪽으로 길을 바꾸리라. 그리고 탈규제 합창 속에 권한은 줄어들고 노조의 말발은 자꾸 세지니, 어지간한 공기업 간부로서는 개혁보다 보수에 뒹굴며 임기만 무사히(!) 마치려고 할 것이다. 철도공사가 유전사업을 벌이고, 도로공사가 위락시설을 짓는 것은 은행이 어물전을 펴는 것만큼이나 생소하다. 철도공사에 무슨 돈이 그리 많아서 사례비와 위약금으로 덜컥 170만 달러나 물어주고, 도로공사가 무슨 힘이 그리 세서 부도난 회사의 자회사가 외국에서 발행한 채권을 국내의 우정사업본부와 교원공제회로 하여금 8300만 달러어치나 사들이도록 사실상의 지급 보증 각서를 써준단 말인가.

노조 지도자로서의 얘기와 대통령으로서의 얘기가 달라야 한다는 주장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공약을 어겼다고 탄핵을 청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라를 혼돈 속에 방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난제의 고리를 단칼에 푸는 지혜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보다 한층 괴로운 문제가 있으니, 노동 운동가 시절의 얘기와 대통령 시절의 얘기가 분명히 달라야 하는 데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경우다. 물론 바뀌지 말아야 할 얘기가 자꾸 바뀌어 혼란을 부추기는 그 반대의 조합도 가능하다. 정권 임기의 절반을 보낸 오늘 이 혼선만 정리해도 남은 절반의 행보가 한결 경쾌할지 모른다. 지난날의 얘기와 오늘의 얘기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의 간단한 자성 말이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