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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성장' 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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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국내 유수의 몇몇 대기업은 하청업체들이 납품하는 물건 가격의 적정성을 파악할 때 그 중소기업의 재무제표를 정기적으로 심사한다고 한다. 심사 결과 중소기업이 이익을 내고 있으면 납품가를 낮추도록 유도한다. 정기적인 심사를 통해 이익 규모를 파악, 그야말로 죽지 않을 수준으로 납품가를 낮춘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이익은 납품가가 후하게 책정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뼈를 깎는 기술개발을 통해 원가를 낮춘 결과라면 해당 중소기업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대기업의 납품업체로 지정된 코스닥 등록 중소기업의 주가가 별로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 눈에 띈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대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1998년 6.5%에서 2003년 8.2%로 높아졌지만 중소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 이익률은 5.2%에서 4.6% 정도로 하락했다.

하지만 이런 것만을 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불평등한 게임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비즈니스 세계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강자가 되기 위해 모두 노력하지만 누구나 강자가 될 수는 없다. 정글의 세계에서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된다. 그러나 이를 불평등의 결과라고만 인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사슴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닌다. 사슴을 보호한답시고 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사슴은 더 이상 열심히 뛸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뛰지 않는 사슴은 당장 편하겠지만 새로 등장할 맹수에게 오히려 더욱 쉽게 잡혀 먹힐 것이다. 자연 생태계에도 적정한 긴장 관계와 경쟁 분위기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기업 생태계는 신생기업.벤처기업.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사이의 경쟁과 협력 속에 시원찮은 기업들은 도태되고 능력 있는 기업들은 살아남아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다만 기업 생태계 내에도 경쟁을 크게 제한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생의 기회를 제공할 필요는 있다.

잘나가는 대기업이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실력 있는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것은 여러 가지 부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최근 대기업의 투자가 인력감축형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투자의 고용 유발 효과가 예전만 못한 반면, 중소기업 투자의 고용 유발 효과는 아직 괜찮은 편이다. 이들 중소기업을 육성.발전시킬 경우 중소기업의 고용 유발과 피고용자의 소득 증대가 가계의 구매력을 증대시킨다. 이는 곧 대기업이 공급하는 제품의 수요 증가로 연결되면서 상생의 고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유망 중소기업을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선별하여 지원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중소기업 상생회의는 의미가 크다. 대통령이 직접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의 없는 대화를 유도한 것 자체가 매우 신선했다. 대기업으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선물 꾸러미를 풀라는 식의 분위기가 계속 되면 곤란하지만 대기업-중소기업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기업 간 소득 재분배 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상생의 분위기를 토대로 정부가 보다 과감한 규제 개혁과 기업 살리기에 나선다면 지지부진한 경제 회복 속도도 조금은 빨라질 것이다. 이번 모임을 계기로 정부가 바람직한 기업 생태계의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한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