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홍길 대장 베이스 캠프 도착
박무택씨의 시신을 수습해 등산로 옆에 돌무덤을 쌓아 장례를 치른 엄홍길 등반대장(오른쪽)이 30일 오후 롱북 베이스 캠프에 무사히 도착해 손칠규 휴먼원정대장과 포옹하고 있다. 엄 대장 일행이 베이스 캠프까지 하산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초모랑마=오종택 기자
"이번 등반은 성공도 실패도 있을 수 없다. 동료를 찾아나서는 산악인의 정신만이 있을 뿐이다…."
계명대 산악회 한승권(50.서도산업 상무.사진) 회장은 지난 3일 해발 5100m에 설치된 베이스 캠프에 도착한 뒤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후배들을 찾아나선 '휴먼 원정대원'들을 만나 이렇게 격려했다. 시신 수습에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날은 마침 엄홍길 등반대장 등 대원 모두가 베이스 캠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저녁 때 대원들과 와인 한 잔씩을 나누며, 눈 속에 숨져 있을 박무택씨 등 후배들을 회상했다. 다음날 한 회장은 1997년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또 다른 후배 산악인(최병수)을 위해 가져 간 음식과 술로 제사를 지낸 뒤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그곳을 떠났다. 귀국 길에 몽골에서 사업상 만남이 예정돼 있어서였다. 올해 계명대 산악회장을 맡은 한씨는 바쁜 시간을 쪼개 현장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한 회장은 하산길 나흘 만에 뜻하지 않게 후배들이 묻힌 에베레스트 길목에서 그들처럼 또 숨을 거뒀다.
네 차례나 히말라야를 올랐고 이 가운데 두 번은 등반대장을 맡기도 했던 한 회장은 하산 중 갑자기 감기.몸살이 오며 고산병 증세에 시달렸다. 그는 해발 3700m인 티베트 라사의 한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았다.
치료 이튿날인 8일 새벽 한 회장은 숙소에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돼 숨졌다. 폐에 물이 찬 폐수종이었다. 그러나 한 회장의 죽음은 휴먼원정대가 박무택씨를 수습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산악회와 가족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무엇보다 원정대를 격려하러 나선 산악회장이 현지에서 숨진 소식이 알려지면 휴먼원정대원들이 상심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한 회장의 형인 재권(51)씨 등 유족들도 죽음을 알리는 데 반대했다.
산악회 지경호(45) 사무국장은 "현지 연락을 받고 곧바로 부음을 냈지만 언론에 사연이 알려지는 것은 막았다"며 "한 방송사가 취재를 해왔지만 그 뜻을 설명한 뒤 양해를 얻었다"고 말했다. 계명대 산악회는 유족들과 함께 사고 직후 티베트 라사를 방문, 현지에서 한 회장의 시신을 화장한 뒤 지난 14일 유골을 경북 경산의 한 공원묘지 납골당에 안장했다. 장례식엔 산악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 회장과 같이 격려 등반에 나섰던 김진문(49.대구산악연맹 기획이사)씨는 "한씨는 언제나 환하게 웃는 산 사나이였다"며 "그래서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뛰어난 대원 3명을 잃은 데 이어 한 회장까지 숨지자 계명대 산악회가 큰 충격을 받았다"며 "엄홍길 대장을 비롯한 원정대가 악천후를 무릅쓰고 끝내 박무택씨의 시신을 수습하는 한국 산악인의 숭고한 정신을 세계에 보여 불행 중 큰 위안"이라고 말했다.
대구=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