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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 노키아, 일어선 IBM … 둘을 가른 건 발빠른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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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달 17일 일본 도쿄의 소니 본사. 히라이 가즈오 사장이 “올해는 주주에게 배당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니가 무배당을 결정한 것은 1958년 상장 후 처음이다. 소니는 올해 회계연도(2014년 4월∼2015년 3월)의 실적을 2300억 엔(약 2조2500억원) 순손실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회계연도보다 두 배로 늘어난 적자액이다. PC사업을 매각하고 TV사업을 분사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믿었던 모바일·커뮤니케이션 사업부문의 실적이 나빠지면서 최악의 경영위기에 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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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90년대 소니는 ‘신화’였다. 소니가 창조한 ‘워크맨’은 기존 오디오 시장의 틀을 바꾸며 새 시장을 만들어냈다. 브라운관 시절에 보여준 TV 완성도는 경쟁자를 압도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과 삼성전자의 디지털 TV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니가 가고 있는 그 길을 모토로라·노키아·에릭슨도 가고 있다. 한때 세계 정보기술(IT) 업계를 호령했지만 이제 그 빛을 잃어가고 있는 기업들이다. 변화를 읽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기 일보직전이거나, 옛 특허를 이용해 돈을 버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답은 명확하다. 세계 IT업계의 패권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제품으로 무장한 신생기업들은 호시탐탐 제왕의 자리를 노린다. 한 순간 방심하면 1등 기업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 게임업체 닌텐도의 몰락이 대표적이다.

 닌텐도는 세계 게임시장을 호령했다. 2009년에는 매출 1조4400억 엔(약 14조1300억원), 영업이익 5300억 엔을 기록했다. 이때 직원 1인당 매출은 10억 엔에 육박하며 도요타의 5배를 넘었다. 그러나 태평성대는 여기까지였다. 닌텐도는 최근 4년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 중이다. ‘재기 불능’이라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이는 게임의 중심이 스마트폰으로 급속도로 이동하는 데도 기존 휴대용 게임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서 몇 번 터치하면 게임을 즐길 수 있는데, 20만원이나 하는 돈을 쓰며 게임기를 사는 멍청한 소비자는 없었다.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회사는 지난해 기준으로 현금성 자산이 4800억 엔이나 된다.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스마트폰 게임 시장에 진입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어려울 때를 대비한다”며 돈만 쌓아뒀다. 시장의 흐름을 무시한 닌텐도의 폐쇄성이 독이 된 것이다.

 한때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50%를 차지하던 노키아의 몰락은 하이라이트다. 지난 2007년 6월 애플이 아이폰을 최초로 선보였을 때 노키아의 최고경영자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는 “조크(joke·농담) 같은 제품으로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우리가 정한 것이 표준이다”라고 호언했다. 모바일 운영체제(OS)도 다른 단말기 제조사들이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앞다퉈 도입했지만, 노키아는 자체 개발한 ‘심비안’만 고집했다.

 구글에 인수된 모토로라도 비슷하다. 1990년대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전화 ‘스타텍’으로 대 히트를 쳤지만 무선통신 시장이 디지털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아날로그에 집중했다. 이처럼 위기는 자만을 비집고 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의 사례는 일류 기업도 혁신하지 않으면 언제든 날개없이 추락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기업의 흥망성쇠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면서 IT 업계의 판도는 롤러코스터처럼 순식간에 변하고 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고, 소비자 트렌드를 한번 놓치면 뒤집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젠 IT기업이 기술혁신과 제품선도에 힘을 쏟고, 소비자의 니즈를 연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한국정보화진흥원(NIA) 황종성 정부3.0지원센터장은 “수많은 M&A와 조직개편을 통해 변신을 거듭한 기업만이 시장의 강자가 되는 시대가 됐다”며 “앞으로는 기업이 어떤 모습으로 변신하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가 기업 흥망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IBM·오라클 등은 한 때 위기에 처했지만 발 빠르게 변신해 살아남았다. IBM은 포춘이 선정하는 초우량 기업에 4년 연속 1위로 선정할 정도로 1990년대까지 명실상부한 최고의 PC 제조기업이었다. 그러나 PC 시장이 대형에서 개인용으로 바뀐 걸 따라가지 못하면서 컴팩·HP·델 등 후발주자에게 시장을 잃기 시작했다. IBM은 주력 사업군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바꾸는 변화를 단행했다. PC부문을 레노버에 팔고, 프린터 부문을 분리했다. IBM은 현재 IT 솔루션 개발 및 구축, 전략수립 컨설팅 등을 제공하는 종합 서비스 제공 기업이 됐다. IBM 수익의 80%가 여기에서 나온다.

 반대로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오라클은 하드웨어 기업을 인수한 이후 ‘어플라이언스’라는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내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운영체제와 오피스 분야에 집중하던 마이크로소프트(MS)는 모바일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노키아의 모바일 단말기 사업을 인수했다. 스위치·라우터를 팔던 시스코는 서버 사업까지 진출, ‘만물인터넷’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IT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IT 산업은 ‘큰 형님’격인 삼성전자의 실적이 나빠지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신흥국의 기술과 품질이 삼성전자를 추격해 오고 있고, 미국·일본 견제도 거제지고 있다. 삼성의 주력 제품인 스마트폰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들어섰고, 그나마 수요가 일어나는 곳은 돈이 안 되는 저가폰이 많이 팔리는 개발도상국 위주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노키아·소니의 전철을 밟지 않고, 세계 IT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수종 사업 발굴에 속도를 내야한다고 주문한다. ‘삼성웨이’의 공동저자인 송재용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앞으로 반도체·스마트폰 외에 신성장동력을 빨리 발굴해서 발전시켜야한다”며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기업간거래(B2B)시장 개척▶기업용 보안 솔루션 개발▶사물인터넷(IoT) 관련 사업 강화 등을 주문했다. 그는 “여러 IT기업이 하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띄운 곳은 없다”며 “삼성이 그 흐름을 먼저 잡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문송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구글·애플은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이 20%가 넘는데 삼성은 여전히 10%대”라며 “소프트웨어 체질로 탈바꿈하지 못한다면 계속 구글·애플 같은 기업에 휘둘리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기적으로 한국 전체의 IT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지원도 절실하다. 사실 4세대 이동통신(와이브로), MP3플레이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모바일 결제 산업 등 현재 세계를 주도하는 혁신 기술의 상당수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발했다. 그러나 전략 부재와 불필요한 산업 규제 등으로 주도권을 해외 기업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박재천 인하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보좌진을 IT기업 창업자나 임원들로 꾸리고, 중국 시진핑 주석은 앞장서서 인터넷 산업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다”며 “서둘러 기업과 함께 ICT세계화 비전을 정립하고 전략을 짜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 자체가 뒤쳐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손해용·이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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