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식물에게 말 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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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랫동안 격조하던 친구한테서 걸려온 전화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긴 수다 끝에 올해도 살구 많이 열렸느냐고, 살구잼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노라고 했다. 또 얻어먹었으면 하는 눈치가 기쁘고 반가웠다. 잼이야 요즘 사람들이 밝히는 건강식품도 아니고 또 비싼 식품도 아니다. 그는 아마 내 집 마당에 열린 걸로 내가 손수 만들었다는 걸 특별하게 여기고 아껴 먹었을 것 같다. 살구잼을 기다리는 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나서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이 열리려나, 유심히 올려다보기 시작했는데 잎만 무성할 뿐 어쩐 일인지 이맘때쯤 매실 크기로 자라 있어야 할 열매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간혹 자라지 못하고 떨어진 열매가 나무 밑에서 눈에 띄는 걸 보면 아주 안 열린 건 아닌 것 같다. 해마다 한 섬도 넘는 열매를 쏟아놓던 다산성의 나무였다. 유실수는 해거리를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아니고 단산이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내가 한 잘못이 있어서다.

아주 오래된 나무인데 해마다 주체할 수 없이 많이 열리는 열매는 예쁘긴 하지만 당도도 높지 않고 쉬 상해서 다 먹을 수도 없거니와 누굴 주어도 반기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는 잼을 만들어서 나누기 시작했는데 받는 사람이 좋아하긴 해도 만드는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해처럼 많이 열린 해는 나중에 지쳐서 끝물은 땅에다 묻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소리 내어 얼마나 살구나무를 구박했는지 모른다. 사람들한테도 우리 살구나무는 주책바가지라고 그 다산성을 흉보곤 했다. 살구나무가 그걸 알아들은 모양이다. 잘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무들은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을 뿐 아니라 곧잘 비관하거나 어깃장도 놓을 줄 안다. 어려서 나는 내가 구박하던 나무가 저절로 죽는 걸 본 적이 있다. 정말 미워서 구박한 게 아니라 그 옆의 내가 좋아하는 꽃나무가 비실비실하는 게 그 나무 때문인 것만 같아서 저 나무만 없으면 하고 바라다가 정말 없어지고 그 꽃나무가 극성스럽게 자라는 걸 보니까 그 꽃나무까지 보기 싫어졌다.

몇 년 전에는 마당에 있는 오래된 목련을 베어버린 적이 있다. 나는 그 꽃이 떨어지는 모습도 별로 좋아하지 않거니와 나무가 지붕 크기를 넘으니까 낙엽이 지붕의 홈통을 메워서 해마다 청소를 해야 하는 불편 때문에 없애려고 했었는데 벤 등걸에서 자꾸만 새싹이 돋았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작심하고 새싹을 손바닥으로 훑어내곤 했다. 이제 죽었으려니 했는데 웬걸, 다음해 봄 어디 며칠 여행을 갔다 온 사이에 싹은 싹의 단계를 지나 톱을 대야 할 만큼 굵은 가장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무의 복수심을 보는 것 같아 차마 톱을 대지 못했다. 가만 놔두자 나무는 해마다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자랐다. 그 성장에 겁을 먹은 나는 그 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미안하다고 소리 내어 사과하기 시작했다. 나무는 내 사과를 받아들인 것 같다. 올해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개화를 선물했다. 그뿐만 아니라 식물에 말을 거는 버릇이랄까 재미도 가르쳐 주었다.

나무에게뿐만 아니라 작은 일년초한테도 말을 시킨다. 물 주는 걸 잊어버려 축 늘어진 걸 보면 미안하다고, 비 맞고 쓰러져 있으면 일으켜 세워 흙을 돋워 주면서 응석 부리지 말고 꼿꼿이 서 있어야 한다고, 옮겨 심을 때에는 여기서 낯가리지 말고 적응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그렇게 말을 해주면 곧 그대로 된다.

하찮은 풀꽃들도 예쁜 꽃을 보려면 손과 정성이 많이 간다. 꼭 내 새끼들 어릴 적 같다. 손이 가도 힘든 줄 모르는 것도 새끼들 기를 때와 비슷하다. 마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잔디를 가위로 깎는 걸, 아는 사람한테 들키면 그런 일은 가끔 사람을 사서 시키지 그러느냐고 딱해한다. 나는 그냥 웃는다. 예전에 우리나라에 축구든가 정구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어떤 양반이 그걸 직접 즐기는 걸, 딴 양반이 보고 뭣 하러 저렇게 힘든 일을 손수 할까, 하인들 시키면서 구경이나 할 것이지 했다는 옛날이야기 생각이 나서다.

박완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