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거품된 민족박물관 건립계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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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각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며 거창하게 추진돼온 정부의 「민족박물관건립계획」이 완전 백지화됐다. 민족박물관건립의 포기는 최근 단행된 정부직제조정에 따라 건립추진 전담기구인 문공부 민족박물관설립사무국이 폐지됨으로써 7년여에 걸친 잉태의 몸부림만을 치다가 끝내 사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민족의 영광과 수난을 한눈에 볼수 있는 민족사의 축도가 될 대민족박물관건립을 위한 2년동안의 검토를 거쳐 76년10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건립추진위원회 발족과 함께 문공부에 민족박물관설립사무국직제를 설치했었다.
당연직위원에는 국방·문교·건설·문공장관·원호처장이, 위촉위원으로는 당시이용희통일원장관·윤위영의원(공화당)·최순우국립중앙박물관장·최영희국사편찬위원장·이형석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등이 위촉됐다.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사무국은 국장1명(2갑)과 사무관 2명, 학예사·행정주사·건축기사 각1명씩을 주도록했다.
사무국을 중심으로해 추진된 건립계획은 10개년계획의 시안을 수립, 늦어도 「78년 착공」을 서둘렀다. 정부는 서울 여의도에 2만평의 시유지를 민족박물관 건립 부지로 고시한데 이어 설계를 위한 관계자들의 해외시찰 나들이를 갖는등 한동안 활발히 움직였다.
전시실은 「역사관」「민족문화관」「생활관」「호국관」「위인선열관」「독립운동관」 「승공관」「5·16혁명관」「새마을관」「미래관」등 10개관으로 나누어 각종 유물과 모험등을 진열, 5천년 한민족사의 축도가 되도록했다.
총 소요예산은 3백38억원(76년현재 불변가격)-.
민족박물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반 박물관이 주로 1930년대 이전의 유물만을 전시하는 것과는 달리 6·25전쟁, 5·16등을 비롯한 현대사료에도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었다.
사무국은 78년 자료수집을 위한 관계자들의 유럽시찰을 마치고 이같은 내용의 시안을 10개년계획(79∼88년)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 계획안은 최종 문공부안으로 학정되지도 못한채 서두르던 건물설계도의 착수에 손을 대지못했다.
민족박물관건립 추진이 지지부진하게된 중요한 이유는 정부예산의 뒷받침을 받지못한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77년 2천만원을 들여 건립부지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하려했지만 예산을 배정받지못해 좌절됐던것을 손꼽을 수있다.
민족박물관건립계획은 78년말 「역사박물관」「자연사박물관」「민속박물관」「호국박물관」「현대미술관」등의 5개박물관을 갖는 종합박물관 성격을 띠고 현존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등을 흡수하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스타일의 대규모 새박물관을 지향하는것으르 시안이 수정됐다.
각계의 상당한 호응을 받은 이같은 수정안도 79년에 들어서면서 예산확보의 난항등으로 갑자기 「용호」의 위용을 잃고 「고양이」가돼 직제마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속된채 시들해지고 말았다.
문공부는 79년4월 민족박물관설립사무국을 중앙박물관산하 직제로 개편하면서 사실상 건립계획의 무산을 선언했다. 이같은 민족박물관건립의 무산은 정부예산투자 우선순위에서 끝내 하위권으로 밀려나 막대한 예산확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76년부터 지난10월초 간판을 내리기까지의 민족박물관설립사무국 예산은 연1천만∼2천만원-.
결국 수억원의 국고예산만을 허비한채 끝내 불발로 끝나고만 민족박물관 건립은 용두사미가 된 문화정책의 표본이란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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