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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층, 뼛속까지 보수·진보는 10명 중 1~2명 불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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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11면

스스로를 ‘보수’ 또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 엘리트들은 실제 현안에서는 그런 인식과 동떨어진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칭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가운데 일관되게 보수 또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인 이는 10명 중 1~2명에 불과하고 8~9명은 사안별로 중도 심지어 반대쪽 입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진보나 보수라고 규정하는 데 신중을 기해 편가르기나 진영논리 남용을 억제하고 진보·보수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큰 것으로 지적됐다.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가 동아시아연구원(EAI)에 의뢰해 실시한 ‘2014 한국사회 엘리트 이념 인식 조사’(연구 책임자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장) 결과다.

보수·진보 개념 재정립 필요한 한국사회

조사는 6월 9일부터 7월 4일까지 국회의원·학자·시민단체 활동가·기자 등 4개 엘리트 집단별로 70명씩 28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이들에게 자신의 주관적인 이념성향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물은 뒤, 집회·시위의 자유나 동성결혼에 대한 입장 등 이들의 진짜 이념성향을 보여주는 ‘객관적 가치판단’ 질문 다섯 가지를 던지는 방식이었다(질문지 내용은 <그래픽> 참조).

그 결과 스스로를 ‘진보’라고 밝힌 사람들 중 일관되게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 이는 전체의 17.9%(27명)에 불과했다. 82.1%(124명)는 5개 중 최소 한 개 이상 항목에서 보수적이었다. 정부 운영의 성패에 대해 ‘결국 사람에게 달려 있다(진보적 입장)’와 ‘결국 제도에 달려 있다(보수적 입장)’를 같이 제시하자 ‘제도’를 택한 이가 32.0%에 이르렀다(‘사람’은 62.0%).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제한이 없어야 한다(진보)’와 ‘제한이 있어야 한다(보수)’를 함께 제시하자 25.3%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없어야 한다’는 69%).

“보수가 진보보다 일관성 낮아”
스스로 ‘보수’라고 한 이들 중에서도 5개 질문에서 보수적 입장을 모두 유지한 비율은 16.7%(16명)에 불과했다. 83.3%(80명)은 한 개 이상 항목에서 진보적이었다. 동성결혼에 대해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진보적 입장)’는 주장을 지지한 ‘보수주의자’가 14.5%에 이르렀다(‘허용해선 안 된다’는 61.5%).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에 ‘전문가의 참여가 강화돼야 한다(보수)’와 ‘일반 국민의 참여가 강화돼야 한다(진보)’ 중에선 33.7%가 ‘일반 국민의 참여 강화’라는 진보적 입장을 지지했다(‘전문가 참여 강화’는 53.7%).

구체적인 정책과 관련된 8개 질문을 던졌을 때도 이념 성향과 실제 사안에 대한 입장 간의 괴리는 상당했다. 스스로 ‘진보’라고 해놓고도 83.4%(126명)가 한 개 항목 이상에서 보수적이었다.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남북관계에서 북한인권 문제를 분리해야 하나’는 질문에 대해 27.5%가 ‘연계해야 한다’며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분리돼야 한다’는 59.7%). ‘진보’ 하면 덮어놓고 북한 인권 이슈화에 반대한다는 등식과는 차이가 큰 결과다. 또 ‘평준화 교육을 강화해야 하나 수월성 교육을 강화해야 하나’는 질문에 진보주의자 중 10.1%가 ‘수월성 강화’를 지지해 보수적 입장을 보였다(평준화 강화 지지는 79.9%).

또 자신을 ‘보수’라고 규정한 사람들 가운데 8개 항목에서 일관되게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이는 더욱 적어 2.1%(2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97.9%(94명)는 최소한 한 개 이상 항목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부의 기업 규제에 대해 ‘현재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에 18.9%가 찬성해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완화해야 한다’는 68.4%).

‘증세를 통한 보편적 복지냐 증세 없는 선별적 복지냐’는 질문에도 자칭 보수주의자 가운데 18.8%가 ‘보편적 복지 강화’를 주장했다(‘선별적 복지 강화’는 71.9%). 전시작전권 이양 연기 논란에 대해서도 13.5%가 “예정대로 2015년에 이양받아야 한다”고 답해 진보 성향을 보였다. 연구진은 총평에서 “보수 성향이라고 답한 이들이 진보 성향이라 답한 이들보다 일관성이 더 낮았다”고 밝혔다.

“내가 속한 조직, 나보다 보수적”
응답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의 이념 성향에 대해서도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다(5점이면 가장 보수, -5점이면 가장 진보). 스스로 진보라고 답한 이들은 현 정부(4.36점)가 새누리당(3.91점)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스스로 보수라고 한 이들은 새누리당(2.81점)이 현 정부(2.52점)보다 보수적이라고 봤다. 진보 집단과 비교하면 각각 1포인트(p) 이상 격차가 났다.

다른 집단에 대한 평가에서도 차이는 컸다. 보수 인사들은 언론에 대해 0.10점을 매겨 ‘사실상 중도’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진보 인사들은 2.58점으로 ‘보수적’이라고 평가했다. 학계에 대해서도 진보 인사들은 ‘보수(1.09점)’라고 봤지만 보수 인사들은 -0.58점을 매겨 중도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일반 국민에 대해선 진보가 1.04점, 보수가 0.32점을 매겨 각각 보수와 중도에 가깝다고 봤다.

진보 인사들은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1.68점으로 ‘진보’라고 평가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선 0.37점으로 ‘중도’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반면 보수 인사들은 시민단체와 새정치연합을 진보적이라고 평가했다(각각 -2.34점, -2.47점).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보수라고 답했든 진보라고 답했든 예외 없이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 성향을 자신보다 보수적이라고 평가했다. 스스로 진보라고 답한 이들은 소속 조직의 이념 성향을 -0.38점으로 평가, ‘사실상 중도’로 평가했다. 스스로 보수라고 답한 이들도 소속 조직의 이념 성향을 보수적으로(1.79점) 평가했다.

“이념, 이분법적 접근 말아야”
연구진은 이처럼 한국사회 엘리트가 보여주는 인식과 실제의 괴리와 관련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진보와 보수 모두에서 구체적인 이념 성향이 혼재돼 있다”고 결론 내렸다. 북한 인권이나 전시작전권 이양, 증세와 복지정책 등 흔히 이념갈등이 강하게 작동해온 것으로 판단돼온 영역에서 보수-진보 대립이 묽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앞으로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을 평가할 때 섣부른 진영 논리 개입을 자제하고 진보와 보수에 대해 달라진 사회상에 걸맞은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할 때”라고 지적했다.

연구 보고서는 조사 대상 ‘엘리트(Elite)’를 ‘사회적 이슈를 의제로 선정하고 정책으로 형성할 수 있는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고 타인보다 더 많은 정치 권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정치 권력을 소유한 국회의원 ▶매체를 보유한 언론 ▶조직·목표·자원을 가진 시민단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정치학·사회학 분야 학자들이다. 국회의원실은 최초 무작위 추출로 선정한 뒤 2~5차례 방문해 거부비율을 최소화했고, 언론은 편집(보도)국장과 부국장, 논설위원 위주로 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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