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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력에 투자하는 이스라엘, 실적에 투자하는 한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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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21면

이스라엘 ‘예루살렘 벤처 파트너스’가 운영 중인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애니클립’. 이 회사는 영화 등 동영상을 대사와 장면 묘사만으로도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 사업 확장을 위해 3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예루살렘=최익재 기자]

이스라엘은 전 세계 창업자들에게 ‘스타트업(Start-up·창업초기 기업)의 메카’로 불린다. 텔아비브는 미국 실리콘밸리 다음으로 스타트업 지원 환경이 잘 갖춰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3월 텔아비브 방문 당시 “글로벌 경제의 미래를 보기 원한다면 반드시 텔아비브를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AOL 등과 같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구글과 삼성 등 굴지의 기업들이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구글은 최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스타트업을 위한 ‘구글 캠퍼스’를 내년부터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삼성도 최근 대구에 ‘크리에이티브 랩’을 열었다. 한국 경제의 화두인 ‘창조경제’ 실마리를 스타트업을 통해 찾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창조경제의 개념이 모호한 데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게 창조경제를 구현하는 건지 분명치 않다. 중앙SUNDAY는 그래서 텔아비브를 찾았다. 스타트업 현장을 둘러보고 한국 창조경제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서다.

스타트업의 메카 이스라엘

 지난달 14일(현지시간) 오전 이스라엘 텔아비브 시내 하프니나 거리에 있는 MS 사옥.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인 ‘MS 액셀러레이터’에 참가한 20여 명 젊은 창업자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일본·인도·스페인 등에서 온 이들은 4개월간 진행되는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노하우를 배우고 있다. 글로벌시장 진출 전략과 회사경영 및 자금조달 방법 등 창업 관련 실무를 익히는 건 기본이다. 눈에 띄는 건 이들에게 제공되는 사무실과 교육 서비스가 모두 무료라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MS는 법률·마케팅·기술 등 부문별로 100여 명의 전문가를 따로 멘토로 두고 있다. 스타트업이 기업의 뼈대를 갖추도록 키우는 교육기관인 셈이다. MS 측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스타트업은 32개국의 300여 업체에 달한다. 프로그램 책임자인 잭 바이스펠트는 “이곳에서 실력을 닦은 스타트업 중 92%가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며 “업체당 평균 유치규모는 150만 달러(약 15억8000만원)이며 프로그램을 마친 스타트업의 시장가치는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패자부활 가능한 생태계
인구 820만 명의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스타트업들의 메카로 떠올랐을까.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앞다퉈 이곳에서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우수한 창업환경을 꼽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잠재력을 갖춘 스타트업들이 양산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글로벌 기업들이 운영하는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 교육을 받는다. 프로그램별로 3개월에서 1년간 무료로 물적·인적 지원을 받는 것이다.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다. 이스라엘 창업자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내수시장이 아니다. 글로벌시장 석권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달 16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2014 이노베이션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민규 에디켓 대표는 “이스라엘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스라엘에서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이미 검증된 제품과 실적만을 보고 투자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 젊은 창업자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경험 삼아 다른 아이템을 찾는 데 비해 우리는 일단 실패하면 업계에서 신뢰를 잃어 재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스타트업에 경제적 지원을 하기 때문에 창업자가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다. 투자자들이 잠재력을 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창업자들은 초기에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창업을 원하는 이스라엘 대학생들이 유치한 투자규모는 상당하다. 이스라엘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09년부터 올 7월까지 텔아비브대학 학생들이 설립한 회사는 141개에 달한다. 이들이 유치한 투자금만 12억5300만 달러(약 1조3200억원)다. 세계 톱 10에 랭크된 대학 중 9위다. 미국 대학 8개를 제외하면 인도공대(4위·31억5000만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액수다. 이렇게 투자받은 벤처 창업가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패가망신하는 일은 없다.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이유다.

 한국은 다르다. 사업 아이디어만으로 투자를 유치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금융회사들은 담보를 요구하고, 투자자들은 검증된 제품을 요구한다. 한국 창업자는 창업 초기에는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야 한다. 그래서 제품이 나오고 실적이 어느 정도 쌓여야지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 그나마 투자를 받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면 창업자는 대부분 알거지가 된다. 업계에서 신뢰를 잃고 완전히 매장된다.

 2000년대 초까지 인터넷 홈페이지 사업을 하다 도산한 A벤처기업의 B사장은 “사업이 망한 뒤 채권자들의 독촉과 업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중국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중국에서 다시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다고 했다.

 텔아비브시 산하 벤처기업 지원 담당부서인 ‘텔아비브 글로벌’의 인발 사피르 국장은 “우리 스타트업들의 창업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추스파(chutzpah)’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추스파는 ‘대담함’과 ‘당돌함’을 뜻하는 말로 주저 없이 공격적으로 밀어붙인다는 걸 의미한다. 사피르 국장은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젊은 창업가가 진취적인 정신을 갖도록 지원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코카콜라도 IT 스타트업 지원
이스라엘 스타트업의 약진은 정부·대학·창업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실제 이스라엘에는 글로벌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센터가 무려 285개나 자리 잡고 있다. 우수한 해외인력들도 대거 몰리고 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혁신(Innovation)의 허브’라는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정부의 전략은 치밀하고 꼼꼼하다. 정부는 경제부 산하에 ‘치프 사이언티스트 오피스(The Office of the Chief Scientist)’라는 특별한 부서를 두고 있다. 벤처기업의 연구개발과 해외진출 등에 대한 지원을 총괄하는 곳이다.

 기업의 최고기술경영자(CTO)와도 다른 개념이다. CTO가 주로 기술 분야의 혁신을 위해 노력한다면 OCS는 기술지원·펀딩·마케팅 등 모든 분야를 담당하는 종합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

 아비 하산 치프 사이언티스트는 “이스라엘 정부는 우리 기업들과 연구개발 협력을 하고 있는 외국 업체들과 외국인 투자자에게 세제·인허가 등에서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며 “해외 자본과 기술을 유인하는 이런 정책은 이스라엘이 첨단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비결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스타트업 지원에 적극 나서는 것은 산업 활성화를 통한 단기적인 고용증가나 세수증대 등을 위한 게 아니다. 그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스라엘에 거점을 둔 글로벌 기업들을 많이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의 먹거리가 될 창조경제의 결실을 맺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러다 보니 IT와 관계없어 보이는 기업도 텔아비브에 진출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전형적인 소비재 기업이다. 그런데도 ‘마인드 스페이스(Mind Space)’라는 간판을 내걸고 텔아비브에서 스타트업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출신으로 센터장을 맡고 있는 알란 보힘은 “코카콜라가 IT 창업지원센터를 오픈했을 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우리 같은 소비재 기업들도 미래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사업 다각화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성공으로 연결하는 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코카콜라의 스타트업 프로그램인 ‘브리지(Bridge)’에 참여하고 있는 10개 업체 상당수는 음료산업과는 관련이 없다. 코카콜라의 사업 다각화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힘 센터장은 “코카콜라의 경우 글로벌 유통망이 있어 키우는 스타트업이 경쟁력 있는 상품을 개발하면 바로 전 세계로 공급할 수 있다”며 “내년에는 이스라엘 외 2곳에 마인드 스페이스를 새로 열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대기업 횡포에 문닫는 한국 벤처
반면 국내 스타트업들의 상황은 열악하다. 대기업의 지원은커녕 오히려 횡포로 문을 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외장형 IT 기기를 만드는 C업체는 국내 한 대기업과 제품 공급 계약을 맺었다. 단독으로는 유통업체 입점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기업 관계자는 이 업체가 가진 특허를 대기업과 공동 개발한 것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또 첫 물량 대부분을 C사가 자사 돈으로 만들고 대기업의 이름으로 판매하자고 요구했다. 대기업은 공급물량 전부를 유통업체를 통해 팔아준 뒤 대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C사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특허만 활용하고 이 중소기업의 제품을 유통업체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납품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C사는 납품대금을 받지 못하고 부도 위기에 몰렸다. 이 회사 관계자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고혈을 빼먹는 게 한국 벤처 생태계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텔아비브=최익재, 서울=이수기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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