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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소갈증 앓던 서거정, 차로 몸 달래며 詩作 몰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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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26면

조선 선비들의 차 문화를 그린 심사정의 송하음다(松下飮茶). [사진 리움미술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다인(茶人)이다. 차를 좋아했던 그는 30여 편의 다시(茶詩)를 남겼다. 그의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이고, 자(字)는 강중(剛中)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그를 보살핀 것은 조선의 대문장가 최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쓴 글에 “처음에 공(최항)이 우리 집안 사람이 되었을 때에 나는 나이가 아직 어렸다. 내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것을 가엾이 여겨 자상하게 일러 주고 타일러 주어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다. 내가 처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집현전에서 10년을 분수에 지나치게도 동료(同僚)로 지냈고, 또 예문관에서 수십여 년을 상관으로 모셨다”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14> 서거정의 차 사랑

권근(權近·1352~1409)의 외손(外孫)인 그는 1438년에 연달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재주를 겨루면 항상 선두를 차지해 당시 사람들은 “권근의 문장이 외손(外孫)에게 전해졌다”고 칭송하였다. 더구나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이었던 최항뿐 아니라 이계전(李季甸·1404~1459)에게도 수학했는데, 그의 ‘증채응교수(贈蔡應教壽)’에 “나의 외조 권근은 도덕과 문장이 백세의 모범이 될 만하여 일찍이 예문응교(藝文應敎)를 역임하고 마침내 문형(文衡)을 맡았다”고 하였고, 이어 “그의 아들 권제(權踶)는 선업을 잘 이었고, 권제는 이계전에게 전하였으니, 이계전은 바로 권근의 (또 다른) 외손이다. 그가 다시 최항(崔恒)에게 전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연원은 바로 외조부인 권근으로부터 이어졌고,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인사들에게 나아가 수학했다. 특히 주역과 시문에 능했던 태재 유방선을 찾아가 수학한 것은 1439년 겨울이다. 그가 쓴 ‘태재집서(太齋集序)’에 “기미년(1439) 겨울에 내가 선생(태재 유방선)을 북원(北原)의 별장에서 뵙고 몇 개월을 곁에서 모셨다”고 하였으니 그의 학문적 깊이나 시문에 능했던 연유를 짐작하게 한다.

지극한 효심에 수양대군도 감동
세조가 그를 신임한 것은 수양대군 시절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조인물고』에 상세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임신년(壬申年·1452년 문종 2년)에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로 사신으로 가던 도중 압록강을 건너 파사보(婆裟堡)에 묵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유서(諭書)가 도착하였지만 수양대군은 이 사실을 다음 날 아침까지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했던 자식에게 어찌 어머니의 절박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으랴. 그의 꿈속에 괴이한 달로 현현한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의 마음을 움직였다. 행여 어머니에게 변고가 있을까 노심초사한 그의 효성은 꿈속에서도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전심(傳心·마음으로 통함)은 어찌 사제지간(師弟之間)에만 통하는 일인가. 자식과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감성의 끈이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거정의 글씨. [경기도박물관]

이런 내용을 전해 들은 수양대군은 “서모(徐某)의 효성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다”고 하고, 서거정을 불러 “지금 그대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세조는 서거정의 인간 됨됨이를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식의 도리였던 효(孝)는 사은종사관이라는 국가의 임무보다 우선시되었다는 것이 바로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였음도 함께 드러난 셈이다.

서거정의 일생은 비교적 평탄했다. 세종에서 성종까지 여섯 명의 군왕을 모신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환로(宦路)는 순조로웠다. 더구나 권근의 외손답게 그의 문재(文才)가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1460년 여름에 사은사(謝恩使)로서 경사(京師명나라 수도)를 방문했을 때, 당시의 문사들이 그가 지은 시고(詩藁)를 보고 놀라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명나라의 관료 문인들을 놀라게 한 그의 시격은 어떤 일격(一格)을 지녔던 것일까. ‘초하즉사(初夏卽事)’를 감상해 보자.

짙은 녹음, 고요하고 소략한 누각 서쪽에는 (濃陰寂寂小樓西)
연못의 여린 풀이 파랗게 어우러졌네 (細草池塘綠已齊)
꽃비에 두건이 젖는지도 모른 채 (不識角巾花雨濕)
종일 난간에 기대어 꾀꼬리 소리를 듣네 (倚欄終日聽鸎啼)
『사가시집(四佳詩集)』 권2

초하(初夏)는 초여름이다. 싱그러운 여름의 경치는 초여름이 으뜸인데, 막 녹음이 짙어지는 소박한 누각의 서쪽에선 서늘한 숲 바람이 끊이지 않을 터이다. “연못의 여린 풀이 파랗게 어우러졌”다는 것은 시적인 색감이 한껏 드러난 셈이다. 녹음이 짙어가는 난간, 꽃비가 내리는 정경은 선경(仙境) 그 자체인데, 그 중심엔 자연과 일체가 된 서거정이 있다. 그러기에 그는 꽃비에 두건이 젖는지도 모른 채 새소리에 이입(移入)된 것이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시화일여(詩畵一如)는 그의 시에서 일경(一境)을 이뤘다.

평생 지은 시 1만 1000여 편
특히 시 짓기를 평생 좋아해 어느 것이든 눈과 귀로 접한 것은 모두 시로 쓰는 벽(癖)이 있었던 듯한데, 이는 ‘졸고후발(拙稿後跋)’에 “이미 1만 천여 수가 되는데도 아직껏 시 짓는 일을 폐하지 않고 있다. 지나치게 좋아하는 버릇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이병(移病)’에는 시 짓기를 좋아해 시마(詩魔)에 빠졌던 자신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하늘의 짓궂은 장난을 내 어찌하랴 (天公惡劇迺吾何)
가랑비 내리는 남쪽 창 아래가 맘에 들어서 (小雨南窓聊可意)
아이 불러 돌솥에 싱그러운 차를 끓이게 하네 (呼兒石鼎煮新茶)
병이 들어 복채를 주고 어떤지 점쳐보니 (病餘握栗問如何)
그 빌미가 시마와 주마에 있다고 하네 (崇在詩魔與酒魔)
괴이해라, 마를 보내도 마가 가지 않으니 (愧底送魔魔不去)
해묵은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네 (年前結習未消磨)
『사가시집(四佳詩集)』 권2

병가(病暇)를 낸 자신의 처지를 “하늘의 짓궂은 장난”이라 했다. “가랑비 내리는 남쪽 창가”는 차를 달이기에 가장 적합한 분위기다. 병든 자신을 위로할 차를 청한 셈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의 병이 생긴 동인(動因)을 찾아보니 술과 시 때문이란다. 결국 그의 병은 “해묵은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또 그가 차를 탐구하고자 육우의 『다경』과 노동의 ‘칠완다가’를 탐독했던 사실은 ‘전다(煎茶)’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단은 제일 유명한 것이고 (龍團名第一)
운각과 설아 또한 싱그럽구나 (雲脚雪芽新)
활화(活火)로 처음 딴 차를 달이니 (活火煎初細)
마른 창자엔 (차)맛이 더욱 또렷하구나 (枯腸味更眞)
노동의 시는 읊을수록 졸렬해지고 (盧詩吟轉苦)
육우의 다경 또한 모두가 장황한 말이로다 (陸譜語皆陳)
사마상여가 앓았던 오래된 소갈증에는 (司馬長年渴)
스스로 마시는 것이 제일이라 (惟宜自酌傾)
『사가시집(四佳詩集)』 권50

용단은 송대 최고품의 차로 황실용 어원(御苑)에서 만들었다. 이렇게 귀하고 싱그러운 차를 센 불과 약한 불로 물을 끓여 차를 준비했으니 분명 차의 맛과 향은 그의 소갈증을 해결하기에 족했으리라. 더구나 갈증이 심한 상태에서 마신 차는 “(차)맛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차는 가장 단순하고, 질박한 상태에서 차의 정기를 드러낸다. 그가 노동의 ‘칠완다가’를 졸렬하다고 말하고 육우의 『다경』을 장황하다고 말한 속내는 무엇일까. 구구한 차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차의 진수를 알아차리기에 장애를 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피폐해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차는 “스스로 마시는 것이 제일”이라 한 것이다. 차의 이로움은 몸으로 느껴야 하는 세계다. 따라서 간명(簡明)한 차의 이론을 일언(一言)으로 표현했던 그는 진정 차를 즐긴 사람이라 하겠다.

특히 그가 차를 달일 때 생강을 첨가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독특한 그의 탕법(湯法)은 ‘사잠상인혜작설차(謝岑上人惠雀舌茶)’에 “눈 녹인 맑은 물에 생강을 곁들여 달이니(雪水淡煮兼生薑)”라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원래 생강은 따뜻한 기운을 지녔다. 사기(邪氣)를 몰아내는 효능을 지닌 생강을 상복(常服)한 공자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생강을 넣어 차를 달인 것은 자신만이 터득한 다법인지 아니면 당시 유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차의 냉기를 중화해 보려는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서거정의 삶에 차는 중요한 일상이었다. 많은 다시와 차를 생활화했던 그에게 차란 무엇이었을까. ‘차운잠상인(次韻岑上人)’에 그 해답의 일단(一端)을 보인 듯하다.

공명은 그림의 떡일 뿐이거니와 (功名眞畵餠)
부끄럽구나. 내 신세 (세속의) 흐름을 따름이여 (身世愧隨波)
때로는 산승이 찾아오기도 하여 (時有山僧到)
한잔 차로 청담을 함께 나누네 (淸談一椀茶)
『사가시집(四佳詩集)』 권13

바로 청담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의 매개물은 차다. 그를 찾아온 잠상인은 바로 김시습이다. 서로가 공명(共鳴)이 되었던 벗, 이들은 차를 나누며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한편 그가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경국대전(經國大典)』 『오행총괄(五行摠括)』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은 후세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그의 저술로는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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