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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북한 전염병 고통 덜어줄 지원 나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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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혜경
(사)새삶 대표·약사
탈북 여성 박사 2호

가을바람이 불면서 남한에서는 에볼라가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에볼라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자가 2주마다 2배 이상씩 늘고 있다.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에볼라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공조가 없다면 내년 1월께 감염 환자가 최소 50만 명, 최대 140만 명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에볼라 소식을 국제뉴스로 접하면서 내가 살던 북한이 수시로 눈에 아른거린다. 필자는 북한에서 보건의료인(병원 소속 약사)으로 10여 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 아프리카의 에볼라 소식이 북한의 전염병 참극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도 경원 지역은 토착 풍토병으로 해마다 환절기에 유행성출혈열이 퍼진다. 사실 그다지 호들갑스러운 병은 아니다. 전염원을 쥐벼룩으로 보고 있는 이 전염병은 농작물을 수확하는 가을에서 겨울까지 성행한다.

 1980년대 초반 내가 살던 지역에서 발병률이 급상승해 보건 당국에 초비상이 걸렸다. 당시 내과의사였던 나의 어머니(탈북해 서울에 거주)는 출혈열 환자 진료를 위해 병원에서 침식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혹시 치료 도중에 감염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들고 하루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평양의학대학병원의 전염병 박사도 현지에 내려와 의료진과 함께 사망 환자 근절에 힘썼다. 하지만 치사율이 높은 이 전염병을 퇴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렵게 호전된 노인 환자들이 2차 감염인 노인성 폐렴으로 숨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80년대 전반에 거의 폭풍처럼 북한 땅을 휩쓸던 유행성출혈열은 현재도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임수경(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89년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밀입북해 참석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폐막을 기점으로 홍역이 발생해 전국을 비상사태로 몰아갔다. 군부대·학교 뿐 아니라 일반 가정집들까지 몸살을 앓았다.

 기본적인 역학고리인 평양~온성행 열차 여행자들의 집에는 ‘전염병 격리’라는 검은색 필체의 큰 딱지를 붙여 상호 왕래를 금지했다. 인민반에서 역학고리 색출과 차단에 혈안이 됐다.

 한동안 ‘홍역 전투’에 시달렸는데 90년에는 옴(Scabies)이라는 피부전염병이 또 창궐했다. 병원들은 조회 때마다 병실 문 손잡이 소독을 강조했다.

 집단 주거시설에 ‘옴 병실’이 설치돼 격리 조치됐으나 병원에 입원 격리된 옴 환자들은 종종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황(S)연고를 바르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 주된 치료인 옴 환자 통제관리가 힘들어 간호사들이 고충을 호소하곤 했다.

 옴 환자가 소강상태를 보이던 94년 10월에는 또 난데없이 콜레라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발생했다. 북한 주민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일제 때나 있었던 콜레라가 웬말이냐.” “김일성이 죽더니(94년 7월 8일) 나라가 망하긴 망하려나, 차라리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당시 보건부는 콜레라를 사회주의 국가 이미지를 해치는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병명을 ‘급성 설사증’이라고 바꿔 부르라고 공문을 내려보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에 식량난으로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는 가운데 콜레라까지 겹쳐 온 나라가 아비규환 상태였다.

 95년 여름에는 장티푸스·파라티푸스·발진티푸스 등 온갖 열병이 우후죽순으로 극성을 부렸다. 당과 정부는 보건 의료인들을 들들 볶아댔다. 길가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행인들은 모두 발진티푸스 환자라는 조소가 쏟아졌다. 발진티푸스를 앓은 환자들에게 이상한 광기, 어지럼증 , 기억상실증이 후유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규모 기아가 휩쓸면서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시장이 당을 점차 대신하면서 성 문란 풍조가 벌어졌다. 이 시기에 성병의 일종인 임질이 출현해 보건일꾼들을 당혹하게 했다. 보건부는 임질 역시 사회주의 국가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질병이라고 규정하고 고노(Gonorrhea)라고 부르도록 의료일꾼들에게 공문으로 지시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전염병은 끊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성홍열·홍역·말라리아·성병 등 온갖 전염병 잡균이 공존하는 ‘거대 전염병 서식지’로 전락했다.

 먹고살기조차 힘든 북한에서 전염병은 생존을 위협하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 당국은 생명력을 다한 ‘무상 치료제’ 찬가만 부르고 있다.

 ‘전염병 백화점’이 된 북한을 떠올리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고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다.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자유와 풍요의 길로 인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에서 약사로 일했던 필자로서는 누구보다 더 큰 책임감을 느끼면서 우리가 함께 노력할 방도를 찾기를 희망한다. 기아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북한 어린아이부터라도 우선 구해야 한다.

이혜경 ㈔새삶 대표·약사 탈북 여성 박사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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