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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서 보기 힘든 내 컬렉션 제주에선 쉽게 만날 수 있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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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08면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2012). 길이가 21m에 달하는 배 위에는 일상의 자잘한 용품들이 삶의 무게처럼 실려있다.

“공간 사옥을 미술관으로 꾸밀 때와는 또 달라요. 그때는 공간에 맞춰서 작품을 골라야 했지만 제주에서는 마음껏 전시할 수 있었어요. 다른 미술관에서는 보기 힘든 제 컬렉션을 많이 보여드림으로써 예술에 대한 제 생각까지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트 이즈 라이프, 라이프 이즈 아트!!”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현장 3곳을 가다

아라리오 뮤지엄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김창일(63) 회장은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세계 200대 아트 컬렉터 명단에 일곱 번이나 이름을 올린 수집가로서, 1978년 처음 청전 이상범의 작품을 산 이래 36년간 모은 3800여 점의 컬렉션을 이제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게 됐다는 희열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중앙sunday s매거진 3월 2일자 참조>

그는 9월 1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에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오픈한 데 이어 10월 1일에는 제주시 탑동로 일대에 미술관 3개를 동시에 개관한다. 폐허가 된 영화관을 리모델링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자전거 가게가 있던 상가 건물을 개조한 아라리오뮤지엄 탑동바이크샵, 그리고 유흥가 모텔을 확 뜯어고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이다. 옛 건물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미술관에 걸맞는 공간을 재창조했다. 전관 개관을 앞두고 24일 진행한 프레스 프리뷰에서 드러난 그의 현대미술 컬렉션 수준과 그것을 수집해온 열정은 한마디로, 놀라웠다.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구슬 작품 ‘사슴 가족’(2014). 구슬빛이 영롱하다.
위로부터 ▶중국 작가 리 후이의 ‘브이’(2011). 깜깜한 공간을 가르는 붉은 빛의 레이저가 인상적이다. ▶한국 작가 김인배의 ‘델러 혼 데이니’(2007). 서로 다른 얼굴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 무엇이 없다.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은 코너에서 설명 중인 김창일 아라리오뮤지엄 회장.

아시아 작가 작품 위주로 꾸민 ‘탑동시네마’
1999년 문을 연 탑동시네마는 제주 최초의 복합상영관으로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꼽혔지만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이 속속 개관하면서 2005년 이후 폐허로 변해 서 있었다. “귀신 나온다”며 철거 민원이 빗발쳤지만 만만치않은 비용 탓에 인수자가 쉽사리 나오지 않고 있던 상황. 커다란 설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찾고 있던 김창일 회장에게 최고 높이가 8m에 달하는 이곳은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19억원을 주고 바로 계약했지요. 그런데 리모델링 비용이 60억원 들었어요. 그래도 이 건물을 살 수 있었기에 제주도 미술관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선명한 빨간색 건물 1층으로 들어가면 일본 작가 코헤이 나와의 구슬 작품 사슴 가족이 관람객을 맞는다. 차례로 서있는 아기 사슴 세 마리와 아빠 엄마 사슴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빛이 영롱하다. 그 옆 칸에서는 스위스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과거? 현재? 미래? 그런 건 없어’가 주기적으로 눈가루가 흩뿌려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잠시 지하로 내려가면 검은 커튼으로 가려진 방이 나온다.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미국 작가 앤서니 맥콜의 ‘원뿔을 그리는 선 2.0’은 빛의 실체를 체감하게 해주는 작품.

2층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배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인도 작가 수보드 굽타의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다. 길이 21m가 넘는 배 위에는 의자·침대·고기잡이 그물·낡은 라디오 등 일상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수해가 많이 나는 인도의 현실과 망망대해에 떠있는 듯한 인류의 미래를 접목했다”는 것이 류정화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안쪽 방에 있는 김인배 작가의 대형 얼굴 조각 ‘델러 혼 데이니’도 독특했다. 커다란 머리에 눈코입은 아주 작게 처리하거나 생략하거나 신경질적인 낙서로 대신해 색다른 느낌이 들도록 했다.

2층 가운데 마련된 복층에는 김 회장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씨킴(Ci Kim)이라는 예명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티로폼을 가져다 긁어내거나 뚫어서 제주의 상징물을 표현해 보았다”고 했다. ‘by destiny’나 ‘experiment’ 같은 영어 글씨를 거꾸로 쓴 네온 작품도 걸려있었다.

“자기 작품을 자기 미술관에 전시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기자단에서 나왔다. “저도 작가인 만큼 제 작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논란의 대상이라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은 아니라는 점만 말씀드리고 싶네요.”

전시의 압권은 3층에 있는 중국 작가 장후안(張洹)의 ‘영웅 No.2’이었다. 100마리가 넘는 소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거대한 인물 조형물이다. 키만 10m가 넘는다. “여덟 조각으로 나눠 들여온 뒤 다시 설치 작업을 마쳤다”고 했다. 소 한 마리 가죽에 통째로 새겨넣은 공자나 부처의 얼굴 부조 작품은 차라리 아담해 보였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아시아 작가에 대한 저의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4층은 독일 작가 지그마르 폴케의 대형 회화 네 점으로 꾸몄습니다. 제가 이 코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컬렉션이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이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작품들이거든요. ‘서부에서 제일 빠른 총’이라는 작품을 미국에서 사게 된 이후 폴케와 인연을 맺게 됐지요.”

맞은 편 카페와 아트숍으로 가니 탁 트인 바다가 지친 눈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탑동해변공연장 너머 항구에는 한껏 멋을 낸 거대한 크루즈가 수평선을 향해 몸을 추스리고 있었다.

영국 작가 앤서니 곰리의 설치 작품 ‘우주의 신체들 I’(2001). 그 뒤로 독일 작가 A.R. 펭크의 회화 ‘독수리와 원숭이’(1985)가 보인다.
위로부터 ▶아라리오뮤지엄 탑동바이크샵에 설치된 김구림 작가의 설치 작품들. ▶아라리오뮤지엄 동문호텔에 설치된 아오노 후미아키의 설치 작품들. ▶아라리오뮤지엄 동문호텔 옥탑방 욕조 속에 상영되는 한성필 작가의 해녀 시리즈.

‘탑동바이크샵’에선 김구림 전위예술 한눈에
탑동바이크샵은 탑동시네마 바로 근처였다. 자전거 가게와 사무실로 쓰이던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은 이제 한 명의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개관전의 주인공은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구림(78)씨다. “현상과 프로세스를 추구한 앙포르멜의 대표 작가”라는 것이 그를 선택한 이유다.

“좀 다르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김구림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김 회장이 직접 기획했다는 1층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1970년작 ‘걸레’가 벽면에서 상영중이다. 걸레질하는 모습을 담은 흑백 동영상이다. 여기에 걸레 설치 작품(1973~2000)과 빗자루 설치 작품(1973)까지 더했다. “더러운 것을 치운다는 컨셉트를 부각했다”고 김 회장은 자신있게 말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세 개의 빨간 통 안에 얼음 덩어리와 한지를 넣고 녹는 과정을 보여주는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1969년 서울의 모습을 촬영해 1초씩 보여주는 ‘1/24초의 의미’ 등이 이어진다. 2층과 3층에는 관계성을 강조한 ‘매개항’ 시리즈와 회화와 콜라주를 결합한 ‘음양’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이미 40년 전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노작가의 외로운 외침이 그곳에 있었다.

탑동시네마도 그랬지만 탑동바이크샵 역시 건물 내부에 인테리어 장식이 없었다. 내벽이 고스란히 드러난 ‘날 것’ 그대로의 상태다. 리모델링을 직접 지휘했다는 김 회장은 “이렇게 했을 때 작품에 더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술관 건축이 물론 중요하지만 건물보다는 내용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미술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좋은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좋은 컬렉터들이 좋은 미술관을 만들고 좋은 전시를 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국 미술이 살아난다”고 덧붙였다.

그로테스크하고 자극적 음기 가득한 ‘동문모텔’
제주에서 한때 가장 번성했던 동문 재래시장 근처에 자리한 동문모텔은 주변이 유흥가였던 탓에 건물 자체도 왠지 음(陰)한 기운이 감돈다. 김 회장은 “탑동시네마나 바이크샵이 밝은 느낌을 준다면 이 건물에는 좀 어두운 기운이 있다”며 “그러나 예술은 양과 음이 공존해야 하며 때론 자극적인 작품이 사람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고 이곳을 미술관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이 건물에는 이른바 ‘센’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3층에서 볼 수 있는 영국 작가 제이크 앤 디노스 채프먼 형제의 작품들. 독일군의 잔혹한 살상행위를 미니어처로 정교하게 표현한 ‘자본이 고장났다! 예스? 노우! 바보!’나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형상의 어린이 마네킹 들을 숲 속 같은 분위기에 배치한 ‘끔찍한 해부’는 그들이 왜 현대 미술계 악동으로 불리는지 한눈에 알게 했다.

버려진 것들을 모아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일본의 아오노 후미아키는 모텔에서 쓰던 낡은 매트리스, 문짝과 창문, 침대 머리 등을 모아 흔적을 재구성했다. 이름하여 ‘동문모텔에서 꾼 꿈’이다. 독일의 A.R. 펭크나 영국의 앤서니 곰리 같은 거장의 작품들 역시 눈길을 붙들었다.

옥탑방으로 쓰였던 공간은 사진작가 한성필이 화려하게 장식했다. 제주 해녀의 모습을 그린 간판들을 찍어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특히 해녀들의 물질 모습을 욕조 안에 동영상으로 처리한 작품은 아이디어와 위트가 돋보였다.

김 회장은 “내년 3월 개관하는 ‘동문모텔 ll’에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젊은 작가들의 작품 위주로 선보일 것”이라며 “앞으로 서귀포 등지로도 미술관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제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아라리오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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