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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을씨년스런 날씨의 탓인가. 신문을 들여다 보노라면 「잔인한 세태」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스산한 늦가을에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포력과 살인사건들에서 세태의 삭막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중 눈에 띄는 두개의 사건. 역곡모녀살해사건과 아기못낳는 부인의 남편살해사건에서 오늘 우리사회의 살벌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역곡모녀살인의 경우에선 이 시대에 새로 등장하는 「동기없는 살인」의 양상을 보는 것같아 일면 어처구니 없고 일면 한심함을 느낀다.
최근 일본등 구미에서 빈발하는 동기없는 살인은 자기의 불만과 증악심을 아무 관계없는 제3자에게 전가해서 길바닥에서나 골목길에서 무조건 범행하는 범죄행태라는 점에서 사회적 우려의 대상이 되고있다.
역곡모녀살해의 경우는 물론 그같은 동기없는 살인처럼 무조건적 범행은 아니다. 갑작스런 충동으로 여인을 겁탈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 살인에 방화까지한 것으로 볼수있다.
그러나 그같은 충동적 범행자체는 동기없는 살인의 무조건성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들의 범행은 정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충동범죄를 유발한 성장과정과 교육환경의 면에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성장이 포악할 리는 없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를수 있는 불만과 증오와 한은 충분히 식고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이들의 충동적이고 무조건적인 범행으로 인생이 결판난 애매한 세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당한 모녀는 물론이고 이들의 살아남은 아버지요 남편은 죽음과 다름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몰지각한 한인간의 충동적 범행이 한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간단히 부숴버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통탄을 금할수 없다.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며 불만을 키워왔을 범인들의 불운을 인간적 연민의 정으르 동정하지 않는바는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불운과 불만을 애매한 제3자에게 돌려 그들을 짓밟고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더우기 그들은 어려운중에도 겨우 조그만 아파트방을 얻어 단란한 행복을 키워가고있는 비슷한 환경의 선량한 이웃들이 아닌가.
이 맹목적이고 동물적인 살인의 광상에서 우리는 이사회의 비정과 잔혹과 절망을 보게된다.
그 「잔혹」은 바로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인 박여인의 넋두리에서 나타난 그「잔인」이다.
박여인이 범행전에 쓴 쪽지엔 『살겠다는 희망을 버린지 오래입니다. 잔인하군요』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박여인은 잔인하게 남편을 죽였으나, 오히려 남편의 「잔인」에 절망하고있다.
이는 한남편과 한아내의 인간적애증이 결과한 비극이지만, 그 근저에는 인정과 대화가 단절된 한 가정의 절망과 답답함이 그대로 새겨져있다.
죽은 남편이 불화한 가정생활에서라도 평소 인간적인 진정과 사랑의 표시를 했으며, 아내가 남편의 냉담과 비정을 이해와 인내로 극복할수 있었다면 이같은 불행은 없었으리란 가늠도 할수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에 있어서 그같은 합리성과 그같은 타협을 적용하기 어려운것이 또 현실이다.
그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며, 답답하며, 또 괴로운 것이다. 「인생고해」는 그래서 옳은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비정과 잔혹의 병리는 그저 어쩔수 없다고 수수방관할수만도 없다.
나라의 장래나 사회의 행복을 책임맡고 있는 위정자나 지도계층의 인사들은 더우기 솔직담백하게 또 양심적으로 이런 사회병리를 진단하고 처방하며 치유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이는 물론 모든 사회성원의 자각과 협조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사회는 궁극적으로 나혼자 살아가는 장소는 아니다. 나와 함께 많은 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다.
그러니까 나혼자만의 행복이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 희생을 강요할 근거는 없다. 또 그런 논리나 주장을 멋대로 전개해서도 안된다.
자기희생의 정신, 자기억제의 노력이 있음으로해서 남들의 행복은 보장되는 것이다. 실로 참된 행복은 남들의 행복을 만드는 「자기희생」을 깨닫는데 있다고도 한다.
이 잔인한 세태를 보며 새삼 그런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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