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패션 50년 (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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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한복식 연우회모임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회원들은 보다 활발한 움직임을 위해서는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그 방안을 모색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회원 각자가 제품을 만들어서 바자를 열어보자는 것이었다.
결론에 따라 한재 양재 편물 액세서리 수예 인형 조화 꽃꽂이 목공예 등 9개 분과위원회는 나름대로 바자에 내어놓을 상품을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그 당시 복식업계는 심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으므로 일반 시장에 나오는 기성복이나 기타 의류들은 요즈음에는 구경도 할 수 없을 조악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회원들이 직접 만든 제품으로 바자를 연다는 것은 연우회 기금 마련이란 본뜻뿐 아니라 모처럼 우수한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도 좋은 착안이었던 것 같다.
정성 들여 마련한 1957년의 연우회 첫 바자는 예상 이상의 대성황을 이뤘다.
아마도 이것이 일반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바자로는 한국최초가 아닐까 싶은데 바자가 시작되자마자 준비한 상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서 금방 바닥이 났다.
그런데도 계속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회원들은 그 동안 준비하느라 고생했던 것도 잊은 듯 즐거운 비명들을 울렸다.
바자 총 매장이 당시 돈으로 80만환(현 8백만원정도) 정도였으니 첫번 시도니만큼 결과 여부를 놓고 가슴을 죄던 회원들은 예상 이상의 결과에 기뻐 어쩔 줄들을 몰랐다.
첫번 성공에 힘입어 연우회는 그 때부터 해마다 여학교 강당이나 백화점 화랑 등을 빌어 연례 바자를 열었다.
믿을만한 큰 업체가 없던 당시 질 좋은 상품에 아쉬움을 느껴오던 소비자들은 바자가 열릴 때마다 대성황을 이뤘고 특히 가정주부들은 연우회 바자를 손꼽아 기다릴만큼 인기가 높았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바자가 붐을 이루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은 경제발전으로 일반시장에도 질 좋은 상품이 흔한데다 바자에 나오는 물건이라고 특별히 더 신경 써서 만드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인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무렵 나라의 경제부흥을 위한 국산품애용 운동이 일어나면서 보잘 것 없는 국산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국가적 차원에서 열을 띠기 시작했다.
밀수 루트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외제품이 아니면 양장점에서 손님의 주문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그 당시의 국산 옷감은 질이 낮았고 그나마 물량이 달려서 필요한 때 구하기조차 쉽지가 않은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뜻있는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국산 복지들의 약점을 디자인아 좀더 신경을 쓴다거나 재봉과정과 끝손질 부분에서 배 이상의 정성을 기울이는 등 애정을 갖고 극복해 나갔다.
모처럼 갖게 되는 의상발표회 때도 외제복지를 쓰면 훨씬 작품이 돋보이고 빚이 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되도록이면 한점이라도 더 우리네 손으로 짠 국산복지를 써 보려고 남다른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러한 복식계의 자발적인 노력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예상 안했던 칭찬이나 상을 받기도해서 나름대로 작은 보람이나 기쁨을 안겨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58년에 열렸던 제1회 국산품 우승배 승취대회에서 국제양장사가 보사부 장관 우승배와 대회장인 이갑성총재의 표창장을 받게 되었을 때 필자와 함께 일해온 수십명 종업원들이 어린애들처럼 기뻐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우리나라 양장계에서 「국제」하면 꽤 알아줄만큼 성업중이었다고는 해도 복식업이 대기업화하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얘기가 안될 정도로 영세성을 못 면했던 때, 필자를 도와 희노애락을 같이 해준 공장 식구들에게 고마운 정을 누를 길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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