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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투자할 곳 잃은 돈 어디로 몰리고 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돈의 흐름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은행 문턱이 높다고 여전히 투덜대면서도 은행예금은 급증세를 나타내고 있고 CP (Commercial Papre) 라는 신종기업어음은 얼굴을 내밀기가 무섭
게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다.
산금채나 개발신탁·장기채등은 없어서 못살 지경이고 증권회사들이 팔고있는 환매채는 사두기만 하면 이익이라는 생각들이다. 금리가 가장 높다는 상호신용금고에 예금을 하려면
번호를 타놓고 기다려야 한다.
저축심이 갑자기 앙양된 탓인가, 추세를 봐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계속적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돈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 것일까.

<실물투자 줄어들어>
79년 이후로 은행저축을 한다든가 각종 채권을 사는 등의 금융자산쪽으로 돈이 몰리고 있다.
77, 78년의 부동산투기가 된서리를 맞으면서 땅 사재기 경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게다가 제2차 오일 쇼크와 정정불안에 따른 투자심리의 위축현상까지 겹쳐 돈은 갈곳을 잃었다.
이처럼 마땅한 투자대상이 없는 데다 80년 초에 접어들면서 금리를 대폭 올리자 돈이 고금리를 향해 급속히 빨려들기 시작했다.
높은 금리도 금리지만 극심한 불황속에 그 정도의 수익을 보장해 줄만한 투자대상이 없다는 판단이 팽배했다. 요란했던 부동산붐도 급속도로 냉각, 78년에는 1백만건을 넘어섰던 부
동산거래는 79년 들어 80만건으로 떨어졌다.
연이은 기업의 부도사태로 기업에 돈줄을 대왔던 전주들은 떼이기 전에 서둘러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사채 갚기에 급급했다.
어쨌든 이 언저리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재산운용에는 상당한 변화의 조짐이 드러난다.
가급적 실물투자는 삼가고 은행예금이나 채권을 사두는 등 금융자산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졌고 따라서 금리에 대한 반응이 전에 없이 민감하게 나타났다.
78년 이후 수익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신탁에 돈을 맡기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나 80년 한 햇 동안 3천5백60억원, 금년들어 9월 현재 2천6백54억원을 끌어 모았다.
지난6월에 발족한 장기신용은행의 장기채 역시 시작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어 9월말현재 1천5백억원 어치를 팔았고 연말까지 2천억원 정도 소화는 무난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중간 중간에 이자받는 것을 재투자하는 복리계산으로는 연 수익률이 한때 35∼36%까지 올라갔으나 최근 들어서는 30%미만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는데도 돈이 계속 몰리고 있다.
대표적인 저축수단인 은행의 저축성예금은 9월 들어 2조원을 돌파해 지난해 같은 기간 증가액의 갑절에 달하고 있다.


특히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금리를 자율화시킨 신종기업어음(CP)과 대폭 금리를 올린 저축예금쪽에 폭발적으로 돈이 몰리고 있는 점이다.

<그림>에서와 같이 기업이 순전히 자기 신용을 바탕으로 금리를 자율적으로 매겨 파는 CP가 지난6월21일에 선을 보인 이후 하루평균 50억원의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꼭 3개월 만인 지난9윌21일 현재 CP를 사간 자금은 모두 3전5백94억원에 달해 단숨에 무시 못할 투자시장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어음을 사는 최소단위가 1천만원이어서 서민들 형편에는 부적합하지만 평균금리가 25%안팎인데다가 어음만기가3∼6개윌 사이이므로 돈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시장으로 등
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기왕 단자시장을 통해서 사두었던 단자회사 발행어음이나 기업어음쪽의 돈이 CP로 많이 넘어갔으나 최근 들어서는 신규자금의 유입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 어음
중개실의 분석이다.
CP못지 않게 일반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금리를 대폭 올린 은행의 저축예금이다. 금리가 연14·4%로 물론1년 만기 정기예금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하루를 맡겨도 이자를
주기로 함에 따라 일반서민들에게까지 전에 없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금리를 올린 첫달인 7월중에는 무려 3천6백73억원이 늘어났고 8월에는 4백67억원으로 다소 주춤했다가 9월 들어서는 다시 l천6백18억원(20일 현재)이 증가하고 있다.
또한 가계저축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만든 우대특별가계정기예금은 금년 들어 7천6백44억원이 늘어났고 가계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가계종합예금도 최근3개월 동안 1백74억원이 증가
했다.
주로 기업예금에만 의존해 왔던 은행저축의 패턴이 가계쪽으로 많이 바뀌어wu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나 꼭 정상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저축예금의 금리를 14·4%의 높은 금리에, 그것도 하루를 맡겨도 같은 금리를 적용시켜 준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당좌예금을 하는데도 이자를 준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당좌예금은 일반적으로 예금을 한푼도 안준다).
따라서 금리체계면에서는 저축성예금과 요구불예금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진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지난7월중 3천6백70억원이나 늘어났던 저축예금증가속에는 요구불예금에서 넘어온 돈이 2천7백억원이나 차지했다는 것도 그러한 예다.

<얼굴 없는 뭉치 돈 많아>
이유야 어떻든 최근 1∼2년 사이에 전에 없던 저축러시가 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른 마땅한 투자대상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저축자들에게 유리한 여러가지 신종
저축수단이 개발되었다든가 금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매우 민감해졌다는 것도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전 같으면 증권시장이 활기를 띠면 은행의 요구불예금이 빠져나가 증권회사의 예탁금을 불려놓았지만 이젠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증권시장을 겨냠한 돈들은 이제는 하루를 맡겨도 이자를 주는 환매채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손쉽게 주식과 채권사이를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돈의 성향에 따라 그만큼 금융
시장도 전문화되어 가는 조짐이기도 하다.
돈에 꾜리표를 붙여놓지 않는 한 어떤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뭉치돈 일수록 얼굴없는 돈들이 많다.
그러나 강롱속에 구겨 넣고 있던 돈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각 금융기관 창구직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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