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0)제75화 패션 50년(1)|최경자|국제양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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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은 세계 어느 대도시의 번화가와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한 명동에 볼일이 있어나갈 때마다 내 머리에는 마치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처럼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전쟁의 처참함을 기억하지 못하는 6·25이후 세대들에게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겠지만 휴전 직후 환도 계획을 서두르던 내 눈에 비친 1954년의 명동거리는 폐허 바로 그것이었다.
전쟁전 한국의 내노라하는 멋장이들이 다투어 찾아들던 그 화려한 유행의 거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전한 집 한채 없이 눈에 띄는 것은 부서져 내린 벽돌 쓰레기더미 속에 앙상하게 서있는 몇몇 큰 건물의 뼈대뿐이었다.
당시 모든 피난민들이 다 그랬듯이 어서 서울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서 양장점 자리를 물색하려고 서둘러 올라왔던 나는 소득이 없는 채 다시 대구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달 뒤 다시 찾은 명동은 하나 둘 새 건물이 서기 시작하고 벌써 영업을 시작한 점포도 몇몇 눈에 띄는 등 첫번 걸음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사람처럼 죽은 듯 했던 거리가 재건의 의욕으로 꿈틀대는 것을 보면서 내 가슴속에서도 줄기찬 생명력 같은 것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아직 허허벌판과 다름없는 명동거리에 양장점 간판으로는 「송옥」양장점과 「한」양장점 단두 집만이 눈에 띄었다.
그나마 「송옥」은 건물만 지어 놓은 채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그 건너편에 「한」양장점만이 유일하게 영업 중이었는데 당시 고위층 부인들을 주고객으로 꽤 성업 중이었다.
양장점과 학원을 겸할 수 있는 마땅한 건물을 찾던 중 지금 E양화점 자리인 명동2가 한 가운데에 새로 지은 2층 건물을 점찍고 주인과 교섭을 벌인 결과 전세로 그 건물을 비는데 성공했다.
지하실까지 합쳐 연건평이 1백여평이나 되는 그 건물은 양장점만으로 쓰기엔 너무 넓은 편이었지만 옷을 만들어 파는 일보다 양재를 가르치는 학원 일에 더 애착을 느끼고 있던 좋았다.
피난살이의 온갖 애환이 얽힌 3년간의 대구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새 점포를 꾸미고 가게문을 연 것은 1954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간판은 남편의 아이디어로 대구에서부터 쓰던 「국제양장사」란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그 옆에 「최경자 양재연구소」란 긴 나무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피난지 대구에서 당장 급한 생계 해결을 위해 내재봉소나 다름없는 초라한 가게를 열 때 『뜻만은 세계를 향해서 크게 넓게 가지라』며 남편이 지어준 「국제」란 이름이 이제 비로소 제 자리를 잡은 듯 개점날의 내 가슴은 벅차기 한이 없었다.
그 때나 이제나 한국의 유행은 명동이고 보면 명동 제일은 한국제일이요, 한국제일이면 언젠가는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우선 지하층은 공장, 2층은 가족들의 살림집으로 쓰면서 1층에서는 고객의 주문을 받는 한편 양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틈틈이 개인교습도 해나갔다.
해가 바뀌면서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활기를 되찾기 시각하고 양잠점도 한집 두집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쇼윈도를 색다르게 꾸미는 등 「국제양장사」경영에 내 모든 아이디어와 정성을 기울였다.
고객이 점차 늘고 연예인들이 하나 둘 찾아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국제양장사」는 당시 활약하던 유명 배우나 가수 같은 연예인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박단마·김시스터즈·윤인자·나애심·안나영·김백초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기스타들이 드나들며 의상을 마춰갔다.
가게가 번창하고 자리가 잡혀가자 나는 뭔가 좀더 보람있는 일을 찾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주문하는 옷을 만들어내는 일 이상으로 내가 애착을 느끼는 양재학원 개설은 여러 가지 여건상 아직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 무렵 우리 가게 건너편에 「아리사」양장점이 생겨 서수연씨와 교분을 트고 서로 오가며 지내게 되었는데 복직관계 일을 하는 이들끼리 모임을 갖자는데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상디자이너들의 모임인 「대한복식연우회」가 1955년6월 발족을 보게 되고 초대회장의 중책을 필자가, 부회장은 서수연씨가 맡게 되었다. <계속>

<필자 소개>50년간 활약…복식 디자인계의 산 증인
필자 최경자 여사(70)는 함남 안변 출생으로 원산 루시여고(31년), 일본동경 오쨔노미즈 양장전문학교(36년)를 졸업했다.
최 여사는 38년 함흥에서 양장전문학원을 열었고, 월남 후에는 최경자 양재연구소를 거쳐 61년 국제복장학원을 설립, 원장으로 있으면서 오늘날까지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국의 패션디자이너를 양성하면서 양장계 일선에서 활약해온 복식디자인계의 「산증인」이다.
68년에는 한국의 첫 패션전문지 『의상』을 창간하여 세계의 최신 패션정보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80년에는 의류수출계의 보다 고급한 인력양성을 위해 재단법인인 국제패션디자인 연구원을 설립, 이사장에 취임했다. 부군 신형균씨와의 사이에 현재 국제복장학원 부원장으로 있는 혜순씨 등 2남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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