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5.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72)|「한-미 경제협정」체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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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직후부터 자유당시절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제는 철저히 대미의존형 경제였다.
48년 정부수립 이전에는 미 군정청이 그들의 점령지구 구제법(GARlOA)에 의해 2억6천만달러의 물화를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제공했다.
그러다가 48년12월 「군국과 미국간의 경제협조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한국은 미국 경제 협조처(ECA)의 정식 수원 국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주미대사관 참석과 함께 구매 관을 파견했다. 어차피 원조는 받지만 가급적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골라 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따라 초기 주미대사관에는 김단선· 이성범· 박원규씨 등 3명의 구매 관이 근무했다. 이중 김세선씨 눈이 대통령이 해방 전부터 알던 재미교포였고, 이성범·박원규씨는 본국정부가 선발해 보낸 사람들이었다.
현재 범양사 회장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는 나의 연전 1년 후배였다.
중앙고 출신인 그는 39년 김연수씨의 경성방직에 취직했다. 해방 때까지 경방의 방계회사인 만주의 남만방직에 근무하다가 47년 김용완씨(전전경련회장)가 창설한 방직협회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가 물러가자 한국인에게 남겨진 산업체란 방직공장 몇 개가 고작이었다.
때문에 미 군정청은 우선적으로 이들 공장에 원면을 공급했는데 당시방직공장 실무경험과 영어회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씨밖에 없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이대통령은 원면구매업무를 맡을 사람을 찾았다. 이씨는 김용완씨의 추천을 받아 발탁했다.
6·25 발발 직전까지 우리 정부가 ECA로부터 받은 원조는 8천3백만 달러였는데 그 대부분이 원면과 무기였다.
이성범씨가 미국에 온 것은 50년4월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만신 워싱턴에 온 이씨는 먼저 미 정부의 GSA에 등록해 3개월간 공개입찰 방법 등을 훈련받아야했다.
이씨가 훈련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6·25가 터졌다. 이씨는 즉각 구매 업무를 개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본국정부로부터 제일 처음 받은 훈령이 『쌀 1만t을 한달 안에 부산항에 닿도록 사보내라』 는 이 대통령의 엄명이었다.
이씨는 지금도 그때 그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원면은 이미 방직협회 근무 때 다뤄 봐 자신이 있었으나 기타 품목은 전혀 생소하기만 했다.
대금 결제를 원조자금으로 하기 때문에 구매 관은 우선 ECA로부터 구매허가를 받아야했다.
PA는 수원 국이 사가는 물건이 정말 필요한 것이며 양은 적절한가 등을 판단하는 과정이었다.
「원조 몇억 달러」등은 정치 회담에서 결판이 나지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미국식 매매관습을 익혀 장사꾼의 지술을 요하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씨가 물자를 구입하는 방식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일단 PA를 받으면 그 물건을 관장하는 부처로 가야한다. 이씨는 농무생을 찾아간다. 농무생은『쌀은 있다. 그러나 업자를 통해서 사라』 고 말한다.
가까스로 쌀 중개상인의 명부를 받아 서신으로 입찰 공고를 띠어보냈다. 그러면 정해진 날짜에 각 중계상인들의 입찰가격이 대사관에 도착한다. 제일 싼값을 골라 낙찰 자를 정한다.
그러면 또 선박을 수소문해야 한다. 해무청에 간다. 『한달 안에 부산까지 쌀을 심고 갈 배가 없느냐』고 묻는다. 해무청은 『배는 있다. 그렇지만 정부대 정부로서는 빌려줄 수 없고 선박업자들과 직접 접촉해야 하는데 리버티 십은 늘여서 안되고 빅토리 십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리버티·빅토리는 2차 대전 때 사용한 미국의 화물선 종류를 말하는 것이다.
이어 선박업자들을 찾아간다. 전세선박을 구하는데는 굉장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모든 용어들이 약어여서 관계서적을 사다가 밤새워 탐독해야 업자들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겨우 운임흥정을 끝마쳐 샌프란시스코의 도궁에 들어있는 빅토리 십에 쌀1만 이크 실었다. 무척 힘들고 고된 업무 였지만 『쌀을 잘 받았다. 또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등의 전보를 주고받는 가운데 보람도 컸었다.
당시. 미국은 모든 게 남아돌았고 우리 나라는 뭐든지 급했다. 담배·밀· 보리· 콩· 옥수수 등 농산물과 기계류를 닥치는 대로 사 보냈다.
그런 과정에서 이씨는 국무성·국방성·농무성 등 5개관서의 실무자들로 구성된 PA심사위원회를 발이 닳도록 찾아다녀야 했다. 모든 걸 아쉽게 사정해야 하는 교섭에서 이씨를 도와준 것이 바로 그의 바둑솜씨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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