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8) 한미외교 요람기-제74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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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델레스」 장관으로부터 PATO(태평양-아시아 조약기구) 얘기를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이 개입하는 집단안보체제는 극히 위험한 생각이며 일본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못박았다.
6·25동란중 한국군의 전세가 불리하자 미군 관계자들간에 대만군이나 일본군을 투입하자는 얘기가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대통령은 당시 『만약 일본군인이 한명이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군은 북한·중공군을 향하고 있는 총부리를 일본군에 돌릴 것』이라고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덜레스」는 이대통령이 워낙 흥미 없어하자 미국의 핵 우위를 강조하며 말꼬리를 돌렸고 이대통령은 미국의 속셈을 내색한 것 이상으로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대통령이 「델레스」와 회담하고 있는 동안 수행원들은 각자 카운터파트와 만나 경제·군사원조에 관한 실무절충을 벌였다.
이날 밤 「델레스」장관은 앤더슨 하우스에서 이대통령부처를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앤더슨 하우스는 미국을 방문하는 국빈을 대접하는 전용 파티장이다.
「델레스」장관은 자신이 주최한 만찬석상에서 이대통령으로부터 통한문제에 대한 말이 안나오게끔 각별히 신경을썼다. 이대통령을 즐겁게 하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델레스」장관은 이대통령을 소개한 뒤 『어떻게 하면 이대통령을 기쁘게 해드릴까를 곰곰 생각한끝에 연전 이대통령이 워싱턴동물원에 기증한 한국산 곰 한쌍을 이 자리에 데려와 보여드릴까 했다.
그런데 동물원장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곰이 그동안 크게 자라서 옮기기가 어렵다고 해 계획을 중지했다. 이대통령은 그 곰과 같이 노령에 들어 더욱 더 원기왕성하시니 반가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그 말을 받아 『곰을 기억해주어 고맙다. 그런데 나도 지금 우리안에 든 곰과 같이 행동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느낄 때가 있다』고 응수해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자신의 방식대로 통일을 못하게 하는 미국을 이렇게 빗대어 공격한 이대통령은 『미국은 공산침략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방침이 있어야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화제가 된 곰 한쌍은 휴전직전 동부전선에서 전투중이던 한국군부대가 생포해 경무대에 선물한 것이었다. 그 곰은 목에 V자형의 흰줄이 있는 반달곰 새끼였는데 이대통령은 이름을 「곰아」 「곰이」로 붙여 특별히 귀여워했다.
이대통령은 이 한쌍을 몇달 키우더니 어느날 갑자기 주미대사관에 전보를 보내왔다. 『 워싱턴 동물원장인 「맨」박사를 찾아가 곰을 기증할 뜻을 밝히고 가부간 결과를 알리라』 는 것이었다. 이어 파우치 편에 검의 사진을 보내왔다. 「맨」박사는 이대통령이나 나와는 구면이었다. 이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집이 바로 동물원 곁에 있었다. 동물을 좋아한 이대통령은 수시로 동물원에 놀러갔고 사육과장이던 「맨」박사와 친구가 됐다.
내가 「맨」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49년1월께였다. 하루는 이대통령으로부터 친전 전보를 받았다. 『어떤 어부가 서해에서 거대한 거북 한 마리를 잡았는데 수명이 몇백년 짜리라고 한다. 모든 국민들이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길조라고 좋아하는데 사육방법을 모르고 있다. 현재 큰 물탱크 속에 그냥 넣어두고 있는데 속히 「맨」박사를 만나 사육법을 알아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맨」박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맨」박사는 『그렇게 큰 거북을 사육할 방법은 없다. 오히려 다시 바다에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의 보고를 받은 이대통령은 거북을 수궁으로 되돌려보낸 적이 있다. 「맨」박사는 곰을 기증하겠다는 이대통령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대통령이 좋아하는 곰을 굳이 미국에 보냈던 것은 V자의 상징을 강조해 한국민의 굳은 전투의지를 미국민에게 보이자는 계산이었던 것 같다.
주미대사관은 이대통령의 이 뜻을 간파하고 곰 기증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를 했다. 곰은 후일 경무대 경무관을 지낸 곽영주가 위로출장 겸해서 데리고 왔는데 공항에 도착해서부터 카메라맨들이 몰려드는등 법석을 떨었다.
곰들이 어찌나 코카콜라를 잘 마셨던지 콜라를 마시는 사진이 미국신문에 대서특필되는등 화제를 뿌려 「델레스」장관이 곰 얘기를 했을 때 만찬석상의 손님들은 모두 다 전후사정을 알고 폭소를 터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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