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 김영주는 일군통역 이었다"|36년만에 밝히는 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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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다음 글은 시인이며 본사동서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인 이용상씨가 해방36년만에 처음 공개하는 실화다. 1924년 서울태생인 이 위원은 43년 보전에 입학하자마자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됐으며 44년 일군을 탈출,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내 생애에 또다시 올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하고 싶은 정열과 낭만과 꿈에 부풀던 항일유격대 시절-.
그때 내 나이 21살, 내가 있었던 형산 유격대 지휘관인 서동이라는 할아버지소장은「조국을 찾아 나선 소영웅」이라면서 일군을 탈출해 온 나를 어루만지며 끔찍이 사랑해 줬다.
좀 체로 놔주지 않는 서 소장에게 간신히 허락을 받고 15개월 동안 정든 유격대를 떠나 중경길 9백㎞의 장도에 오른 것은 8월1일이었는데, 도중에 8·15를 맞아 그렇게도 갈망했던 광복군참가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 중앙 군 193사단 왕용덕 참모장이 『우리의 전후수습을 도와 달라』는 요청에 따르기로 했다.
최전방에 위치한 이 사단은 머지않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일본어통역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10월 총공격」을 계획 중이던 중국 군은 8·15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9월9일 남경에서는 역사적인 일본군투항 접수 식이 거행됐고 그후 중국 군 각 부대는 할당받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일제히 전방으로 물려 갔다.
내가 소속돼 있던 193사단은 일본군 독립혼성 82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주주방면으로 출동했는데 아마 9월26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주주는 장사동남쪽 20㎞지점 한 구∼광주간의 오한철도와 항주·주주를 좌우로 잇는 절박 철도가, 교차되는 요지였다.
나는 사단을 떠날 때 숙중광 사단장으로부터 앞으로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일체 숨기고 동경유학 중에 전쟁으로 귀국한 육군대위로 가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조선인이라는 내 신분이 밝혀지면 아직 전의를 버리지 않은 일본군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봐도 중국 군 육군대위로 알도록 위장했고 가슴에 부착한 청색위관명찰에는 군번을「l910821」로 기입했는데 사단장이 그 숫자의 뜻을 묻기에 『1910년 8월21일은 한일합병이 조인된 날이고 나는 조인전인 8월21일의 진짜 조선인이다』고 대답했더니 사단장을 비롯한 여러 참모들이 박수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다음날 중령 둘, 소령 둘 그리고 나까지 5명의 대표는 아침 일찍이 마상에 올랐다.
회담은 2시간 정도로 여러 절차를 끝내고 오후에는 중국 군이 인수받을 일군무기와 탄약이 산더미처럼 쌓인 국민학교에가 봤다.
당시의 정보로는 일본군인들은 자기네 총기를 중국 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파손시킨다거나 탄약을 야밤에 강물에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평소 그렇게 깔봤던 중국 군에 무장해제를 당한다는 굴욕감에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회담은 시작됐는데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인지 나는 처음부터 일본군통역관에게 눈길이 끌렸다. 그 통역관은 비록 일본말을 하고 있었지만 용모는 물론 발음 속에 강한 평안도억양이 섞여 있었다.

<만주서 쫓겨다녀>
나는 기회를 틈타 그를 탄약상자 야적장으로 불러내 대뜸 우리 말로 말을 걸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나도 조선사람입니다.』
중국 군 대위가 조선말을 하다니? 그는 몹시 당황하여 얼떨결에 중국말로 『예? 예?』하다가 곧 겁에 질린 경계의 눈초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나는 위축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심부름꾼이 된 자신이 부끄럽다고 변명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김일선, 나이는 24세라고 밝히며 어릴 때부터 만주일대를 쫓겨다니며 자랐는데 어디를 가나 뒤를 따르는 일본특무 원을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서 호구(일본군)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김 통역은 내 손을 잡으며 장황하게 하소연을 하려 했으나 나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면서 『당신이 정말 항일투쟁한 집안이라면 그. 명예를 걸고 나와 약속할 수 있겠소』하고 물었더니 그는 황급해 하면서 무슨 일이든 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생명을 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죽더라도 우리는 해방된 조국을 한번보고 죽어야지요.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주시오. 이곳 일본군여단은 순순히 중국 군에 항복할 것 같소? 놈들은 자포자기로 결사대 같은 것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만…왜놈들은 항복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공기가 좀 험악했습니다만 지금은 완전히 풀이 죽었습니다. 놈들은 아침저녁 처자얘기나 먹는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그렇겠지만 팔팔한 젊은 장교들은 아직도「야마또다마시」니 뭐니 하고 떠들고 있는 모양인데 김 동지는 앞으로 놈들의 동정을 잘 살펴 그때그때 내게 보고해 주시오. 특히 결사대의 공격기도 같은 것 말이오. 잘 협조해 주면 무장해제가 끝나는 대로 당신을 우리부대로 오게 해서 생활은 물론 귀국절차 등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소.』

<춤과 권총의 명수>
그후 김일선은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나도 약속대로 그를 중국 군에 데려와 10개월 동안 같은 방에서 침식을 함께 했는데 소학교밖에 못 다녔다는 그는 제법예의도 바른 듯 했고 명랑했으며, 특히 사교춤과 권총의 명수였다.
그해 추석날밤 밝은 달을 보며 우리는 강 언덕에서 술을 마시며 고향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돌연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왜 일본군에 붙어 있었느냐』는 내 질문을 받을 때가 제일 괴로 웠 다면서 자기가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떻게 그 유명한 신화 속의 노장군인 김일성 장군의 동생이란 말인가? 아마 자기가 일군에 있었던 것을 변명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꾸며낸 말일 것이다. 아무든 앞으로는 그에게 친일파라는 괴로움을 주지 않도록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자>고 다짐했고 또 그것을 실행했다.
그때 우리는 다망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 숙소로 뛰어오더니 가까운 소금공장 토담(토벽)에『조선사람 여기 있습니다』고 써 있더라는 것이다. 둘은 곧 말을 타고 달려가 그곳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박창수와 문동수를 만났다. 두 사람은 징병1기로 끌려왔다가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유격대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즉시 왕 참모장에게 부탁해서 그들을 사단수송대에 근무하드록 했다.
이로써 내가 있던 193사단에는 조선사람이 4명이 됐고 서로 위로 격려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고락을 함께 했다. 다음해인 1946년5월 상해에서 귀국 선을 타고 나와 함께 서울에 온 그들은 우리 집에 1주일간 머물다가 고향인 이북으로 떠났다.

<함께 서울까지와>
문동수는 지금 배에 있을 것이고, 신의주 동 중 출신인 박창수는 신의주 자기 집에서 무위도식하고 있는데 『동양에 와서 같이 일하자』는 김영주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몇 차례 더 받고서야 그는 김영주가 중국의 그 김일선 임을 알고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판단, 목선을 타고 남하하여 육사7기로 1사단부 사단장을 지냈고 지금은 서울 신사 동에 살고 있다. 박창수도 처음에는 김일선이가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었는데 언젠가 북괴에서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만나 보고서야 그들이 친형제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72년 남북회담 때 TV에 비친 김영주는 중국시절보다 훨씬 비대했으나 얼굴은 옛 그대로 여서 나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후일담 한 토막-. 남-북 적십자회담이 무르익던 74년 어느 날 나는 고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민족적 창원에서 사명감을 갖고 그와 한번 만나 보겠다』고 건의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청와대 쪽의 반응은『김영주에 대해서는 당분간 함구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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