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수많은 판검사 배출한 고시 마을|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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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조의 대학자 이율곡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학문하는 자세를 논하는 가운데 『학자는 반드시 성심으로 도에 향하고 세속잡사로써 그 뜻을 난하게 하지 아니한 후에야 학문하는 것이 기초가 되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옛 학자들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글을 읽었다. 눈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 귀가 듣기에 즐겁고 욕심나는 것, 혀로 맛보기에 달콤하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들을 멀리할 수 있고 그 영향을 받지 않을 곳을 택해 공부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속칭 고시 마을 (고시촌).
이 마을을 찾는 고시 준비 생들도 되도록이면 번잡하고 탁한 도회지를 떠나 오관의 즐거움을 멀리한 채 입신의 꿈을 키우고 있다.
서울 동부 지역 시계로부터 겨우 10여리길. 버스로 20분만 달리면 서울의 탁한 대기와 시멘트 빌딩 숲을 벗어나 울창한 산림과 시원한 냇물이 흐르는 상산곡리에 닿는다.
산골마다 10∼20여 가구씩 올망졸망한 동리를 이룬 곳이다. 상산곡 일대도 행정 구역을 l반부터 12반까지 나눌 정도로 20여 가구가 한 동네를 이루고 있는 말 그대로 산골 마을이다.
검단산의 양지바른 줄기에 자리잡은 부락들이 모두 수려한 자연 풍광 속에 묻혀 맑은 공기와 적요한 주변·환경으로 수학에는 최적지.
이 마을이 고시촌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여년 전부터.
이 마을 출신으로 대학 2년 재학 중이던 지난 58년 제10회 고등 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심훈종씨 (45)가 방학이면 동료들과 고시를 준비하면서부터인 것 같다고 마을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었다.
심씨는 75년에 서울 지방 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다 77년에 변호사를 개업한 사람으로 마을 사람들은 심씨가 올망졸망한 여러 부락 중의 하나인 동수막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산골 마을이 고시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이다.
첫째는 서울에서 가깝고 교통편이 좋아 고시 준비생들이 쉽게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집에서 날라오거나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치고는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번잡하지 않은 마을 분위기에다 마을 주민들도 판·검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인심 좋기 때문.
이곳에서 11년째 고시 준비 생을 하숙시키고 있는 유찬준씨 (44)는 자기집에서 공부해 판·검사된 사람들을 열 손가락 넘게 헤아릴 수 있다며 75년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광정 (37·변호사) 안상수 (35) 김상태 (41)씨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유씨는 자기집에서 공부하다 고시에 합격하고 인사차 들러 준 때는 무엇보다도 자랑과 고마움을 느낀다며 최근 2∼3년간은 그런 정리를 맛보지 못 해 서운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아쉬워했다.
또 고시 하숙생을 맞은지 3년째 접어들었다는 이복임씨 (64·여·상산곡리 104)는 『장차「높으신 어른」이 될 학생들이 우리 집 에 기거한 것만도 큰 기쁨이 아니겠느냐』고 자랑했다.
이곳 하숙비는 하루 3끼니의 식사를 포함, 한달에 7만원.
요즘같이 방마다 학생들이 가득 찰 때에는 월수입이 50만∼70만원씩이나 된다.
그래서 최근 하숙치는 사람이 몇 집 늘었고 기존 하숙집도 방을 두 세 칸씩 늘렸다고 한다.
상산곡리 일대 고시 하숙집은 40여가구에 학생 수는 5백여명. 요즘 같은 방학 철이면 방이 모자라 함께 온 친구들은 한방을 두명이 쓰기도 한다.
공부방은 주인집과는 담을 달리한 별채에 마련돼 있고 조용한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 평소에는 동네 아이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방은 별채 한 칸에 5∼9개 정도. 대부분이 1인1실용으로 2∼3평 남짓한 크기다.
방에는 판자로 만든 책상 한 개, 이불 한 채 외에 20여권씩 책이 있을 뿐 단출하기 그지없다.
책상 앞 벽에는 『정신일도하사불성』『초전박살』 등 경구가 걸려 있기도 하고 기분 풀이용 낙서 판까지 만들어 놓아 집중적인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 해소를 꾀하는 모습도 보인다.
고시 준비생들이 한집에 머무르는 기간은 대체로 6개월, 길면 2년 정도.
한 집안에서도 공부방 분위기가 싫증나면 동료들과 방을 바꾸거나 이웃집으로 이사, 분위기를 잡는다고 한다.
이들의 하루 공부 시간은 평균 13시간, 공부가 잘 될 때는 17시간까지도 한다.
그야말로 밥 먹는 시간과 약간의 수면을 빼고는 공부에만 몰두하는 셈.
그래서 전기요금도 엄청나게 나와 방 9개의 유씨 집은 한달 평균 2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같은 요금은 선풍기·냉장고·세탁기·형광등 등 모든 가전 제품을 쓰는 서울 시민의 한가정보다 3배 이상 많은 셈이다.
이곳을 찾는 고시 준비 생도 갖가지. 방학 철에는 주로 대학생·대학원생들이 많고 만년 고시 재수생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지난 겨울방학을 이곳에서 났다는 이윤희 군 (22·건국대 행정학과 3년)은 『많은 학생들이 조용한 곳을 찾아 절에나 독서실에 파묻히기도 하지만 이곳의 인심과 자연을 잊을 수 없고 분위기도 좋아 다시 찾았다』고 했다.
또 이군과 같은 집에서 공부하는 홍승기 군 (23·고려대 법학과 3년)은 『서울의 신림동 본가에서 학교 도서관까지 등·하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분위기가 산만해 이곳을 찾았다』며 『새벽 3시 취침, 아침 7시 기상으로 하루 13시간씩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정강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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