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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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찢어지게」까지는 몰라도 「상당히」는 가난했던 모양이다.
내가 돈이란 것을 처음 구경해본 것은 7세나 됐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에 할아버지께서 『이것 너 가져라』하고 주시는 것을 받아보니 희한괴괴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 쪼가린데 내 손바닥만했다고 『이게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돈이라는 것인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살수 있다고 하셨다. 그것 참 희한하고 신기한 물건이구나 생각하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바지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다.
밤새 잠을 설치면서 무엇을 살까 궁리하다가 필통을 사자고 결정을 내렸다. 두 달만 있으면 입학을 하니 필요하고 또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책보를 허리에 매고 달려갈 때 찰깍찰깍 필통소리가나는 것이 근사하고 부러웠다. 당장 그놈을 사서 자갈이나 나무토막을 넣고 보자기에 할아버지의 한문책과 함께 싸가지고는 허리에 메고 나도 한번 달려볼 작정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시장으로 걸어갔다. 얼음이 꽁꽁 언 겨울새벽이 고 거리는 빨리 걸어도 20분이 더 걸렸다. 하도 신바람이 나서 추운 줄도 몰랐다. 그러나 돈 가지고 뭘 사본 경험이 없는 나는 문방구에 가야 필통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가게라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덮어놓고 필통 내놓으라 했으니 정신이 어떻게 된 놈으로 구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여섯 군데서 퇴박·구박을 받고 속이 있는 대로 다 상해서 간신히 문방구를 찾았다.
『필통…』하고 돈을 내미니 주인은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하고는 문을 탕 닫아버렸다. 돈이란 무엇이든 다 살수 있는 것이라던데 안 된다니? 아하, 이게 장난감 가짜 돈이구나?
가격에 대한 관념이 머리에 없는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돌아오니 고생한 것이 분해서 눈물이 다 나왔다. 돈을 쭉쭉 찢어 날려버려도 성이 다 풀리지 않았다. 돈과 나는 첫 상면부터 이처럼 궁합이 안 맞더니 지금까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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