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밴 「무사안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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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가계수표제를 도입한다, 크레디트카드제를 보급한다하는 금융기관 이용관습의 제고방안이 어디 은행으로부터 나왔읍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백날가야 안할겁니다. 할 까닭이 없지요. 왜냐하면 가만히 앉아있어도 돈쓰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찾아와 굽신거리는데 뭣하러 번거롭게 금융관습개선방안같은 것을 만듭니까.
자율화, 자율화하지만 아직 먼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지도하고 강제력을 작용하는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앙부처의 한 중견관리는 우리나라은행들은 너무나 안일한 타성에 젖어있다고 상당히 높은 톤으로 성토했다.
그동안 은행이 크게 발전한 것이 사실이고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해온 공적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은행에대해 하고싶은 얘기를 하라고 한다면 한마디씩은 다 할 것이다.
물론 은행을 보는 눈에 자신도 모르는 고정관념이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능동적으로 일을 하려고하지 않는다, 너무 보수적이다, 면책구실만 찾는데 열심이다 하는 얘기들을 많이한다. 30여년 관치를 받으면서 타율적으로 일을 해온 타성이 체질화했다고들 말한다.
만성적인 자금의 초과수요장태에서 업무를 개선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고자세로 앉아 고객을 대하는것이 몸에 했다는 애기를 듣게됐다.
그러다보니 은행문턱은 높아지고 금융관습은 바람직하지못한 방향으로 형성되어온 것이 적지 않다.
원리적으로 보면 은행은 자금의 공급자인 가계와 자금의 수요자인 기업사이에서 저축을 투자로 연결시켜주는 금융중개자이고 따라서 기능상 문턱이 높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돈을 예금하러가면, 그겻도 큰 돈일수록 친절대우를 받지만 맡긴 돈을 찾으러가거나 투자자금을 위해 대출을 받으러 갈때는 고자세로 돌변한다.
은행과 가까우면서도 묘한 관계에 있는 재무부사람들도 은행을 볼때 불만스러운 점이 많다.
칫째, 실제는 그렇지앉은데 재무부가 사사건건 간섭한다면서 스스로 자율화노력을 하지않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전 시중은행의 한간부가 재무부에 왔다가 말 끝에 『더워 죽겠는데 재무부는 왜 냉방도 못하게하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재무부관리는 에너지절약시책은 재무부가 하는 일이 아니고 동자부소관인데 그거야 은행경영자가 고객서비스를 위해 판단해서 해야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는 것이다.
뭐든지 재무부가 간섭을 하고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나, 그렇게도 소심하게 눈치를 살피는 경영태도에 한심함을 느꼈다는것이 관리 불만이었다.
재무부의 이재국사람들은 요즘에도 재무부가 콩놔라 팥놔라 하는 간섭을 하고 있다고 보는것에 못마땅해한다.
지난번 주총때 이사선임과정에서조차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재무부측 주장이다.
둘째는, 업무를 창의적으로 개발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않는다는 것이다.
금융기관 이용관습 제고방안도 그중의 하나지만 기업의 금융비용 부담을 덜어주기위해 취한 「4·3대환조치」에 대한 은행측의 소극적인 태도를 예로 꼽는다.
단기 운전자금으로 대출해다가 시설투자에 쓴 돈중 계속 상환 연장조치를 해주는 자금을 텀론으로 대환해주라고 한것인데 은행측에선 마지못해, 그것도 재무부 독촉을 받고야 했다.
당초 1조5천억원가량 예상했으나 실적은 약 4천억원.
번거러움을 알면서도 움켜쥐고 있으려는 속성때문이 아니냐고 풀이했다.
세째는, 은행조직이 경직화·관료화되어있는 점을 지적한다.
어쩌다가 부장회의나 담당이사회의를 소집해 보면 자신있게 책임을 지고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지점장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출해 줄수있는 전결한도가 은행에 따라 5백만∼3천만원이고, 그 이상은 본점의 승인을 받아야하는데 그래가지고 어떻게 기업의 투자활동이나 경영을 상담해주는 뱅커로서의 기능을 할수 있겠느냐고 보고있다.
이제는 부동산 담보나 잡고 대출해주는 땅짚고 헤엄치기식의 금융장사는 더이상 통할수 없는 일인데 아직도 그 차원을 못벗어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일은행의 민영화와 한미합작은행의 신규설립에 즈음해서 은행장은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놓고 얘기들이 오갔다.
그중에는 은행체질의 개혁을 위해 은행장만은 기업가출신이 맡도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제는 은행도 기업가적인 센스를 갖고 업계와 경기동향에 민감하게 대처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전문 뱅커아닌 기업가가 은행경영을 맡는것에도 문제가 없지않지만 은행의 체질개선을 바라는 여론도 주의를 끈다.
밖에서 보는 은행- 거기에는 은행의 속사정을 모르는 단견과 편견이 있을수 있다. 은행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여겨질 부분도 있으리라.
그동안 정부에서 다 시키고 사고가나면 책임을 묻는 풍토, 보수·인사·조직등 일일이 간섭하던 관치의 그늘, 그리고 신용거래가 정착되기엔 아직도 거리가 먼 풍토. 이런 것들이 은행이 안고있는 문제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문제는 함께 협력해서 풀어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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