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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하르빈서 만난 동포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국인 안내원 조씨는 북경에서 하르빈까지 3시간 정도 비행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1시간반만에 하르빈에 도착했다. 기온은 북경보다 5도 정도 낮았다.
공항에서는 송이라는 인물이 마중 나왔는데 그는 흑룡강성 대외 인민우후협회 간부이자 생의 외사부 부책임자라고 했다. 주요 직책을 가진 관리일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됐다. 조씨가 짐을 찾으러간 사이 그는 막힘 없는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아니, 한국사람이세요?』
『그러문요. 우리 성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고있죠.』

<문혁땐 박해받기도>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됩니까?』
『5만명 가량 될거예요. 문화수준도 중국사람보다 훨씬 높아요.』
그는 자랑스레 말했다.
공항을 나와 호텔로 가는 자동차안에서 들판의 일하는 농부들을 보고 있는데 송씨가 말문을 열었다.
「문화혁명 기간 중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했어요. 그래서 아직도 농업은 근대화·기계화되지 못하고 있읍니다.』
『문혁 기간중 송 선생은 어떻게 지내셨읍니까?』
『시골로 내려가 막일을 했지요. 진저리나는 일이었읍니다.』
『이곳 한국인들 중에도 그렇게 당한 사람이 많았나요?』
『물론입니다. 의사·교사·정부관리 등 전문직종의 사람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모두 복귀했읍니다.』

<일 관광단 떠들어>
외국인 호텔에 도착하여 방안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점심을 들러 아래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북경과 천진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조그만 식탁으로 나를 안내하고는 하오2시30분쯤 데리러오겠다고 말했다. 점심을 같이 들자고 간청했지만 자기네 식당에서 들겠다고 사양했다.
나는 호텔이건 대중식당이건 일반시민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었기 때문에 외국방문객들을 그들보다 특혜가 많고 값비싸게 따로 대접하는게 언짢았다. 그렇지만 제도가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왁자지껄하고 어줍잖은 일본관람객들이 와글대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게다가 가져다주는 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음식이라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오늘밤 저녁에는 우겨서라도 밖의 한국음식점에 가야겠다고 별렀다.
오후에는 데리러온 송씨와 함께 송화강둑을 산책했다.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송씨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그는「흑룡강 일보」라는 한국어 신문의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뉴욕에서 동포가 왔는데 당신을 몹시 보고 싶어한다』며 호텔로 와달라고 말했다.
송씨처럼 툭툭한 목소리의 윤 편집국장은 그보다는 나이가 덜 들어 보였다. 송씨가 윤 국장에게『우선 여기서 이야기 좀 나누고 한국식당에 함께 갑시다』고 말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신문은 타블로이드 4면의 작은 신문이지만 3만4천부를 발행한다고 윤 국장은 말했다.
『1페이지는 그날 그날의 주요 뉴스, 2페이지는 경제·산업뉴스, 3폐이지는 문화·정치·교육뉴스, 4페이지는 신화사통신의 외신뉴스를 게재합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기사도 싣나요?』
궁금해서 내가 물어봤다.
『관영 신화사통신에서 보도하는 것만 싣습니다.』
『신문사 종업원은 얼마나 되나요?』
『편집국에만 편집·번역·일반사무를 보는 사람이 42명, 공무국에 20명이 일하고 있읍니다.』
윤 국장은 자매반점이라는 한국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는데 근무복 차림의 중국사람과 한국사람들이 들어차 떠들썩했다. 자리가 나기까지 우리는 잠시 서서 기다렸다. 윤 국장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체구가 작달막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그가 주인이라고 말했다.

<경상도 사투리 써>
『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쭈글쭈글 주름진 손을 내밀며 그가 말했다.
이씨는 그 자리에서 아들과 두 딸을 불러
『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가장 맛난 음식을 가져오너라』고 일렀다.
그들은 부리나케 열두어 가지의 한국음식과 중국음식을 만들어 가져다주었다. 뒤를 이어 부인이 기름 묻은 손을 앞치마로 닦으며 쫓아 나오더니『하르빈에 잘 오셨네요』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인사하며『손님이 오셨는데 음식이 변변치 못해 어쩌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부인에게 중공에 와서 처음 한국음식과 맥주를 대한다고 말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경상도에서 오셨나요.』
『네 그래요. 고향이지요. 동생이 살았다면 아직 거기 살텐데. 주소가…. 헤어진지 40년이 되지요. 죽기 전에 동생과 식구들을 보기나 할 수 있을는지…. 그야 못 이룰 꿈이겠읍니다만….』
『그래서 안되겠죠.』
나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조국통일을 갈망>
『우리 조국의 평화통일과 여러분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서』라며 내가 축배를 들었다.
『통일과 재결합을 위해서.』
윤 국장과 이씨도 함께 목청을 돋우며 건배했다.
그날 우리가 몇 차례나 건배를 거듭하고 플래스틱으로 만든 맥주 잔을 얼마나 비웠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자정이 가까왔고 식당 안에 남은 사람은 우리 일행과 주인가족 뿐이었다.
그들은 윤 국장과 내가 지불하려는 음식값을 막무가내로 마다했다. 그들의 부드러운 눈에는 눈물방울이 아롱거리고 있었다.『또 와주세요.』자동차가 차가운 만주의 어두움 속으로 빨려드는 것을 바라보며 두 노인이 주름진 손을 흔들었다.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 차갑고 어두운 청주의 밤처럼 가냘픈 것이기에 내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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