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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계곡에서의 어느 하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문을 닫지 않으면 집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계곡의 물소리가 시끄럽다. 아파트에 앉아 밖에 시선을 주면 국민학교 때 소풍을 갔던 정릉의 산과 물 흐르는 계곡이 바로 내 집 뜰인 듯 눈 안에 들어온다. 며칠 간 계속 내린 장마 비로 해서 계곡의 물은 9층에서 내려다보아도 흙탕물로 콸콸 흐른다.
오늘은 오랜만에 해가 났다. 빨래를 해다 널고 베란다에 서니 비안개 자욱이 뿜어 올리던 산천은 목욕하고 난 여자처럼 싱그럽게 빛난다. 인근 주택 지붕 위에 한 남자가 울라가서 지붕을 손본다.
이같이 화창한 날 저녁, 청조(작가 김청조씨)가 아들을 데리고 오고 경옥이 저녁을 해놓고 왔다. 청조가 몇 시간 전에 샀다는 립스틱을 보여준다.
연두색인데 입술에 칠하면 빨갛게 된다. 내 동생 채원(작가)과 경옥, 우리 어머니(작가 최정희 여사)까지 모두 그 신기한 립스틱을 돌아가며 발라본다. 과연 연초록 빛깔이 입술 위에서 꽃 자주 빛깔이 되었다. 우리들은 똑같이 빨간 입술로 아이들도 있으니까 저녁은 밖에 나가 무엇을 사먹자고 의견을 모았다.
어머니는 집에 계시기로 하고 나는 동생 채원의 아기를 업기로 한다. 채원은 아기 젖병이며 기저귀가 든 가방을 멘다. 잠깐 나들이에도 아기 짐은 금방 한 가방 불룩하다. 채원이 아기 기르는 것을 보면 그 헌신이 눈물겹고 안스럽다.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직도 아기보다 채원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년만에 내가 왔다고 채원이도 아기를 데리고 어머니 집에 와 있다. 어머니와 우리 두 형제, 통틀어 삼 형제라 말하던 옛날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우리들은 청수장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장마 때인 데다가 주중이어서 인지 길가에 늘어선 허술한 음식점에서는 우리들을 손짓해 불렀다. 우리들은 음식점 앞 소쿠리에 담긴 빈대떡이며 파전, 돼지족발 같은 것들을 살피며 맛있는 것을 찾아 계속 위로 위로 올랐다.
청수장을 지나 자리잡은 곳은 흔들거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계곡 가에 비치파라솔을 펴놓은 정취 있는 곳이었다. 나무에 매단 전등 빛이 물위에 어리고 숲이 둘러싸듯 서 있었다.
어른들은 파전을 먹고 세 아들들은 저편 테이블에서 뜨거운 닭죽을 먹었다.
"아이구, 남자들을 한 달씩이나 혼자 두다가 바람나면 어쩌려고. 대단한 형제들일세."
친정에 와있는 우리 형제를 보고 이웃 부인이 말했다. 우리들 남편에게도 누가 색시를 한 달씩이나 떼어두다니 겁도 없다고 말할까.
현실감 없이 꿈결같은 시간이 물위에 실리듯 지나갔다.
버스 종점에는 오늘 하루의 일과를 마친 버스들이 대여섯 나란히 서 있었다. 경옥과 청조를 태운 택시가 흐르는 등불같이 가파른 언덕아래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남편을 떼어둔 「대단한」 우리 형제는 그들의 자식을 데리고 통금이 가까운 길을 흔들흔들 걸어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니는 채원과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등에 업힌 아기까지 세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 사이에 안고 "요기두 내 새끼가 있구, 요기두 내 새끼가 있구, 요기두 내 새끼가 있구" 하셨다.【김지원】

<필자약력>43년생 65년 이대 영문과 졸업 현대문학 통해 데뷔 창작집 "먼 집, 먼바다" "폭설" 현재 뉴욕 거주 작가 최정희 여사의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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