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150) 태평양동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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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승만대통령은 대미외교에 치중하면서도 미국 내 여론이 결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순조롭게 움직여주지 않자 독자적인 외교포석을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공산집단의 위협을 물리치는데는 인근 우방의 반정전우를 규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미국이 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발족시키고부터는 한국의 방위에 대해 점점 관심의 도를 줄이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결 나온 것이 태평양동맹(Pachific Pack)의 모색이었다. 서구가 나토를 조직해 지역방어에 나서듯 아시아에도 지역안보체제가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 단계로 변영태 씨를 마닐라에 특사로 보내「퀴리노」필리핀 대통령의 의향을 타진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이어 총통서리를 잠시 내놓고있던 장개석씨를 진해로 초청해 본격적인 협의를 벌였다. 그리고는 이 대통령 자신이 50년2월14일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맥아더」장군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맥아더」장군은 한국방위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고무적인 말을 했으나 태평양동맹에 대해서는 직접 논평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관계국과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소극적인 견해를 보였다.
또한 그는 공산국가에 자극을 주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 되자 이 대통령은「키리노」필리핀 대통령에게 미 정부에 직접 접근해줄 것을 강력히 희망하는 한편 주미대사관에『국무성과 교섭해 동의를 얻어내라』는 훈령을 보내왔다.
장 대사와 나는 국무성을 찾아갔다. 우리는 한국에서 미군이 빠져나가고 무기지원도 신통치 않은 이 마당에 한국이 독자적인 안보대책을 세우는데는 이 방법밖에 없음을 집요하게 설명했다.
국무성의 반응은 태평양동맹이란 아이디어가 지역국가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인지를 탐색하고는 극히 외교적인 언사로 일관했다.
『아이디어도 좋고 지역국가들이 단합하자는 데 반대할 의사도 전혀 없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 관여하는데는 문제가 있으므로 여러모로 검토해 시기를 보자』는 것이었다.
장 대사는 이 대통령의 훈령을 받고 이 문제 때문에 직접 필리핀을 방문한 적도 있으나 성과는 지지부진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외교의「귀신」이라는 이 대통령은『그러면 한미방위협정을 체결토록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것 역시 국무성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런 제안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일본과 방위협정을 체결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정이 다르다』『방위협정을 원한다고 아무 나라하고 다 체결할 수야 없지 않으냐』『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방위에 깊은 관심을 갖고있다』는 등등….
당시 미국에는 2차대전 후 시작된「브링·보이즈·홈」운동(Bring boys home)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는데 일부에서는 그 운동을 공산계열의 충동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 결과 종전당시 1천2백만 명이던 미국의 대군이 47년에는 80여만 명으로 감축되었다.
이러던 차에 50년4월 미 상원외교분과위원장「톰·코널리」의원이 유에스 뉴스 엔드 월드 리프트지와의 회견을 통해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장차 한반도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질문에『미국은 한국을 지지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안 간다. 또 한반도가 우리의 방위선 밖에 놓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고 답변했다.
우리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섰다. 장 대사는「애치슨」장관을 직접 만나「코널리」의원의 발언을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애치슨」장관은 장 대사와 나에게『나는 한국이 성공적으로 국토를 방위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패배주의를 동정하지 않는다. 「코널리」의원이 미국의 외교정책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똑같은 대답을「무초」대사로 하여금 이 대통령에게도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50년6월에 들어서는 미국신문들이『38선에 북한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등의 기사를 공공연히 보도했다. 나는 모든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너무나 무력한 약소국의 외교관 신세를 한탄했을 뿐 묘안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의 간청으로「덜레스」국무성고문이 50년6월22일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덜레스」장관은『미국이 한국을 놓칠 리 만무하다』며 장 대사와 나를 안심시키려했다. 그러나 사흘 후 6·25는 터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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