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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5>|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⑪한표욱|주한 한국대사관 창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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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승만박사가 귀국한 후 나는 다시 하버드로 돌아와 47년6월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식장에서「마셜」국무장관은 전후 유럽부흥을 위한 유명한「마셜·플랜」을 발표했다.
나는 고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이박사와 그토록 부화했던「하지」장군이 그해에 해임되고 후임에「월리엄·딘」장군이 임명됐다.
47년8월「마셜」장관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했음을 수긍하고 국무성 고문인「존·포스터·덜레스」씨와 미국의 유엔주재 대사「워런·오스틴」씨로 하여금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47년11월14일 유엔총회는『유엔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한반도에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43대0으로 통과시켰다.
이박사는 5·10선거 후 구성된 제헌국회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방년8월15일 취임식을 가졌다.
나는 하버드대학원을 졸업한 후 곧 집사람이 공부하는 미시간 대학으로가 철학박사학위 코스를 밟았다. 49년1월이면 박사학위를 받게되어 있어 나는 48년부터 귀국할 준비를 했다.
물론 이박사에게 귀국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며 48년 말께 출국절차를 밟았다.
방역주사까지 맞고 여객선사정을 알아보고 있는 중에 이대통령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귀국 계획은 당분간 보류하고 다시 소식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 바란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전보가 왔다.
『장면박사가 곧 주미대사로 가니 워싱턴으로 가서 장박사를 보좌해 일해주기 바란다.』
곧이어 이박사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다.
『「필립」, 자네도 알다시피 미국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나라다. 우리가 미국덕분에 독립했고 또 단독정부도 수립했다. 앞으로도 미국과는 특수한 관계가 유지되어야한다. 나는 처음 주미대사로 임병직군을 생각했다. 그런데 장택상군이 곧 의무장관직을 그만둘 것 같아 임군을 그 후임에 앉힐 작정이네.
장박사는 미국에서 공부도 했고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이야. 그러나 유학한 것이 꽤 오래 되어 근자의 미국에 대해서는 혹시 소상히 모를지도 모르겠다.
자네를 서울에 부르고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자네 같은 사람이 주미대사관에 꼭 필요해 1등 서기관에 임명하니 열심히 일해주길 바란다.』
장박사는 48년12월『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한국』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된 파리의 유엔총회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중 표년1월주미대사로 발령을 받아 바로 워싱턴에 부임했다.
이박사의 지시를 받은 나는 지체없이 워싱턴으로 왔다. 제일먼저 장기영씨의 아파트를 찾아가「도대체 어떻게 외교관생활을 해야할지」를 상의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는 과거 나를 아껴주던 국회도서관의 동양부 책임자였던「허멀」박사를 찾아가 조언을 요청했다.
「허멀」박사는 외교관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교과서적 설명을 하고는 당장 외교관의 체면을 유지하는 문제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당신 나라는 예산이 충분치 못해 넉넉한 생활을 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은 체면을 지켜야 한다. 워싱턴은 계층간에 주거지역이 다르니 가능하면 부유층이 사는 점잖은 지역에 아파트나 집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멀」박사는 그의 아들이 국무성에 근무하고있어 외교관의 생활에 관해서 상당히 정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최근까지 미국의 주 파키스탄 대사로 있다가 며칠전 주 중공대사로 임명된「아더·허멀」씨.
장대사가 부임했다. 그리고 물자구매담당관(참사관)으로 유학생 출신의 김세선씨가 임명됐다. 장대사·김참사관·한1등 서기관, 이렇게 셋이서 대한민국의 주미대사관을 창설한 것이다. 나는 청소만 빼고 모든 일을 혼자 다해야하는 딱한 처지에 직면했다. 당장 대사관건물을 구하고 장대사의 숙소를 정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했다.
공관은 이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인「스테거」변호사가 워싱턴DC 서북5번 가에 있는 자기 소유의 콜롬비아 빌딩1층 방 셋을 쓰도록 제공했다.「스테거」씨는 우리들의 딱한 처지를 동경해 파격적으로 싼 임대료를 받고 건물을 제공한 셈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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