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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시인, 다섯 번째 시집 '밤의 입국 심사' 출간

중앙일보

입력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신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폭 넓은 사랑을 받아 온 시 ‘비망록’으로 등단한 김경미(55)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제목에서 결연함이 느껴지는 네 번째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이후 6년 만이다.

숙성 기간이 긴 탓인지 시집 안에 빼곡한 70여 편의 시는 하나의 빛깔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다채로운 색채로 빛나는 별무리처럼 분위기와 느낌이 제각각이다.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한 줄의 감동’을 얻으려면 부산하면서도 예민한 마음의 움직임으로 시편들을 살펴야 할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번 시집 속 시인의 색깔을 큰 수고 없이 조금이나마 맛볼 수는 있다. 부분은 결국 전체를 드러내기 마련. 1부에 실린 몇 편의 시들은 김씨 만의 독특한 향취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 실린 시 ‘나, 라는 이상함’은 화자 자신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잦은 이사와 기차는 사랑하지만/밟아대는 산책과 등산복은 싫은 것/가만히 있는 건 유리창처럼 근사한 일/유리창 옆에 혼자 있는 건/산꼭대기 구름처럼 높은 일//(…)슬픔에 담갔다 꺼낸 것들은 안심이 된다/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은/무조건 믿어도 좋다’.

좋게 말하면 독특한 취향이나 성벽, 박하게 말하면 예측할 수 없는 변덕의 소유자인 화자는 의구심의 눈초리를 세상을 향해 던진다. 하지만 ‘이해 불능’이 악화돼 세상에 대한 불화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말하면서도 시인의 목소리는 명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배와 비행기야말로/제정신인가/어디든 가고 싶다고/쇳덩이가/공중부양의 엽서가 되다니’.

명랑을 가장한 시인은 단일한 얼굴이 아닌 여러 개의 얼굴로 세상을 사는 듯하다.

‘망치와 못 틈에 끼인 내 성격은/오늘은 7개에서 내일은 2개로 줄었다가/3개를 버려 지금은 마이너스다/당신들은 몇 개를 발휘하고 몇 개를 휘발시켰는지’.

사회적 자아, 퍼소나의 개수를 헤아리며, 혹은 남들의 개수에 궁금해 하며 세상살이 균형을 잡으려는 이는 소심한 사람이다.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숫자 세기에 몰두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세 번째 시 ‘오늘의 괴팍’ 역시 자아의 성벽에 관한 얘기다. 화자는 비사교적인 사람이다. ‘즐겁고 득이 된다는’ 사교 모임에 가는 문제를 두고 고민이 깊다. ‘당신들은 팔꿈치와 입과 농담이 강’하지만 ‘나는 일관성과 발가락과 희망이 약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은 사소하다 싶은 생활 속 장면들이다.

네 번째 시 ‘맨드라미와 나’에서 화자를 울리는 바깥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라는 정도가 화자의 고민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어쨌든 화자는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바늘로 손톱을 따 그 따끔한 아픔에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다. 밤새 울 기세다.

울분, 안타까움, 손 쓸 길 없는 안타까움을 바늘로 찔러가며 다스리는 고전적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시집의 표제시는 없다. 제목의 구절은 전체 3부로 나뉜 시집에서 2부 앞 부분에 실린 ‘연애의 횟수’에 나온다. 전문이다.

‘그 나라 입국할 때는 기록해야 합니다/그러니까//밤의 횟수를//가령 검은 눈물 자국/베개를 지나/침대 밑으로 죽은 팔처럼 길게 흘러내린 밤//그렇게 죽음의 태도를 지녔던 첫 결별의 밤/스물한 살의 봄이었는지/열일곱 살의 책가방 든 가을 고궁이었는지//서른다섯 살까지는 몇 번의 태도가 있었는지//가장 최근에는 누구였는지//온 생에 단 한 번의 태도도 없었던//불행한 자를 제외한 누구나//실연의 피격(被擊)과 가격(加擊)의 횟수를/실명과 주소까지 낱낱이 기입해야//골목의 모양과 부피가 다른/지도를 허락하는//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감각적인 사랑시다. 연애의 횟수는 실은 실연의 횟수다. 시에서는 밤의 횟수로 표현된다. 밤으로 이뤄진 이 나라의 골목과 거리는 입국심사서에 기록된 연애 상대방의 이름과 시시콜콜한 에피소드 등에 따라 모양이 결정되는 모양이다. 고즈넉하게 과거 이력을 헤아리는 경험 많은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등단작 ‘비망록’에도 닿아 있는 김씨의 면모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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