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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간 춤춘 것 보다 TV 출연 2분 덕에 우리를 알아보네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현대무용수가 대중의 관심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발레라면 주역급 무용수들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스토리 없이 추상적 개념을 집단으로 표출하는 현대무용은 난해하다는 편견과 함께 무대 위 주조연의 구분도 모호해 스타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그런데 요즘 현대무용의 인기가 치솟았다. 8월15일 막을 내린 Mnet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 시즌2’의 여파다. 발레·현대무용·스트리트·댄스스포츠 등 온갖 장르에서 선발된 최고의 춤꾼들이 실력을 뽐내는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독보적 움직임을 가진 현대무용수들의 활약이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무용수들이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 중에서도 등장과 동시에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 순위에 오르며 폭발적 인기를 누린 두 여인이 있다. 9회(8월 8일 방영분) 마스터매치에서 모던발레 스타일의 흑조 vs백조 컨셉트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던 최수진(30)·이윤희(30) 콤비다.

현란한 테크닉과 소름끼치는 표정연기로 무대를 휘어잡는 흑조와 가만히 서 있어도 우아함 그 자체인 백조. 두 ‘절친’은 실제 모습도 그랬다. 최수진이 똑부러지게 대화를 리드한 반면 이윤희는 수줍고 말수가 적었다. 최수진이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춘다면, 이윤희는 역할에 빠져드는게 좋아 춤을 춘단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가 되어 멋진 동작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프로였다.

‘댄싱9’은 숨은 아마추어를 발굴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프로들이 ‘크로스오버 콜라보’ 무대로 승부하는 팀리그 포맷이다. 9명씩 드림팀을 꾸린 ‘레드윙즈’와 ‘블루아이’ 가운데 올해는 ‘블루아이’가 승리해 총 5억원 상당의 상금과 갈라공연권을 가져갔지만, ‘레드윙즈’에 속했던 두 친구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졌지만 정말 잘 나간 것 같아요. 저희 춤의 좋은 느낌을 많은 사람에게 선보일 수 있었으니까요.”(최)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어요. 들어가기 전에도 좋은 경험하고 즐기자는 마음이었거든요.”(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동기인 두 사람이 친해진 건 최근이다. 학교 때는 최수진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 선배나 교수들과 공연 다니기 바빴다. 졸업 후 이윤희는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최수진은 미국 시더 레이크 컨템포러리 발레단에서 각자의 길을 걷다가 지난해 수진이 귀국한 뒤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댄싱9도 수진의 설득으로 나오게 됐다. 다른 팀이 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같은 팀이 돼 서로 의지하며 힘을 얻었고, “같이 안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게 이들의 이구동성이다.

-최고 실력 예술가들인데 방송에 출연한 계기는.

이: 방송에선 수진이가 꼬셨다고 얘기했는데, 제 의지도 없지 않았어요. 올해 서른인데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어요.

최: 주변의 권유로 시즌1때부터 고민했는데, 그때는 사실 걱정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시즌1 이후 많은 분들이 춤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제가 나름 외국에서 활동했지만 무용계에서나 알지 일반인들은 모르잖아요. 저를 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무용수로서 이만큼 열심히 해온 걸 제일 좋은 모습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아서요.

-개인의 기량보다 콜라보레이션 팀웍으로 평가를 받는 시스템에 불만은 없었는지.

최: 하면서 점점 레드와 블루의 성향이 도드라졌는데, 레드가 저랑 맞았어요. 블루는 스트리트 성향이 강하고 레드는 클래식 비중이 컸는데, 관객 쪽에는 스트리트가 화려하고 자극적이라 많이 어필되지만 우리는 화려함은 없어도 여운이 남는 클래식의 매력을 잘 보여준 것 같아요.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우리만이 할수 있는 성숙한 무대였거든요.

-크로스오버 무대가 음악으로 치면 관현악단 연주자와 밴드 뮤지션이 뒤섞인 격인데.

최: 재밌었던 건 우리는 경쟁이 너무 부담되는데 스트리트는 배틀 문화라 서로 경쟁하는 걸 즐기고 자부심도 느낀다는 거에요. 춤에 점수가 바로 나오고 평가받는 것 자체에 상처도 받았는데, 그런 걸 스트리트 쪽에서 융화시켜주더라구요. 우리가 승패에 부담느끼고 있으면 그쪽이 ‘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기면 된다!’고 감싸줬어요.

이: 춤추는 사람들은 대개 순박해요. 가족같은 분위기로 무대까지 갔죠. 관계가 불편하면 같이 춤 출 수 없어요. 춤에선 다 드러나거든요.

“현대무용 매력은 자유로움”

사실 이들과 함께 댄싱9의 인기를 견인한 건 ‘블루아이’의 김설진이었다. 벨기에 피핑톰무용단 소속의 김설진은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과 남다른 예술성으로 초반 급부상했지만, 콜라보 무대가 거듭될수록 주변을 배려하며 개인기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바람에 ‘받쳐주는 김설진과 돋보이는 최수진’이라는 프레임까지 생겼다.

“제가 욕심쟁이 같은데…각자의 개성과 철학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아주 다양한 게 현대무용의 묘미에요. 설진 오빠랑 비교되는 기준점이 없어요. 발레는 규정된 테크닉에서 비교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워낙 개인을 중요시하니까요. 저는 주로 현대무용팀으로 유닛을 꾸리고 오빠가 타 장르랑 많이 한 것도 있어요. 같은 장르끼리는 서로가 장점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일단 잘 하는 걸 하고, 다른 장르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수 있거든요.”

인터뷰 내내 둘의 휴대전화는 2~3분 간격으로 정신없이 울려댔다. 대부분 지인들의 축하문자나 인터뷰 섭외란다. 밖에서도 알아보고 “마치 연예인 본 것처럼 좋아해 준다”며 다소 상기된 표정이다. “25년 열심히 했던 것보다 단 2분 만에 제 춤을 본 사람들이 더 많아져버렸다”는 것이 최수진의 말이다.

이번 시즌엔 루마니아 국립오페라발레단 출신 윤전일, 비보이 그룹 갬블러크루의 박인수·김기수 등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춤꾼들이 많았다. 아직 대중에 알려진 이름들은 아니다. 사실 웬만한 무용공연은 관계자나 가족으로 채워지기 일쑤다. 결승전 MVP로 뽑힌 김설진은 수상소감에서 “한국에 대단한 댄서들이 많은데, 그 댄서들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했다.

“우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대에 서는 거니까,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힘이고 보람이죠. 외국에선 10회 공연을 해도 전석 매진이 되고 모르는 이들에게도 박수받고 인정받았는데, 그 짜릿함을 한국에선 느낄 수 없었어요. TV를 통해 우리 춤이 사람들에게 각인됐다는 것이 굉장한 선물같아요.”(최)

“국립현대무용단조차도 공연 때 자리가 많이 비거든요. 친척이나 가족들이 자리를 채워주죠. 방송에 나가니 팬들이 생기고 촬영장에 찾아오더군요. 불과 몇 분이시긴 했지만, 감사했어요. 앞으로 공연장에도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이)

“제게 ‘마스터’라는 호칭이 주어졌지만, 댄서분들이 저에게 ‘마스터’인 것 같다”는 이용우 마스터의 고백처럼, 이번 시즌엔 워낙 최고 수준의 프로들이 출전해 드래프트와 멘토링을 맡은 마스터나 심사위원들이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날카로운 평가와 독설을 날릴 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멘트를 들으며 자존심 상하지 않았나 물으니 “그게 대중의 눈이구나” 깨달았단다. “워낙 무용계는 우리를 잘 아니까요.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도 ‘걔는 원래 어떻다’는 선입견으로 본다면, 이런 반응은 오히려 새로웠어요. 전문적 지적보다 ‘멋있다’‘잘한다’는 단순한 감탄사에 내가 이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구나 싶고,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최)

“무대에서 현대무용 더 가깝게 나눌 것”

-둘다 발레로 시작했는데 왜 현대무용으로 바꿨는지.

이: 저는 일찌감치 선생님이 토슈즈보다 맨발이 유리할 거라고 권해주셨어요. 발레를 기본으로 하되 틀에서 벗어나는게 어울릴거라구요. 현대무용은 자유인 것 같아요. 정답이 없는 게 매력이죠. 발레는 각도고 뭐고 다 정답이 있잖아요. 현대무용은 자기가 추고 싶은 게 답이죠. 움직임 자체가 그냥 춤인 게 매력이에요.

최: 그땐 그저 현대무용이 더 즐거웠어요. 돌이켜보면 발레는 정해진 스토리와 캐릭터가 있어서 거기에 빠져들어 한다면 현대무용은 내 삶과 내 생각, 모든 것을 녹여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자존감이 세서 생각이 많고, 그걸 몸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제 생각과 모든 것을 더 오래오래 표현하면서 살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주역이 없다지만 현대무용은 작품이 곧 주역이에요. 자기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하는 거니까요.

-수진씨는 미국에서 한창 주목받을 때 귀국했는데.

“분명한 목표가 있었어요. 5년이면 제가 타이틀로 활약할 시기가 올 거라는. 그런데 그 시기가 3년만에 왔어요. 그 찰나에 충분히 활동하고 얻을 걸 다 얻었죠. 현대무용이란 자기 춤을 춰야하기 때문에 거기서 아무리 잘해도 수진 최 보다는 시더레이크 무용수로서 활동하는 거니까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빨리 내 춤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댄싱9 갈라쇼(9월9~14일 유니버설아트센터) 우정출연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쉬지 않고 다양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최수진은 올해가 가기 전에 댄싱9에 함께 했던 스트리트팀과 공동으로 재미난 프로젝트를 계획중이라고 귀띔했다. “이제 무대로 보답해야 할 것 같아요. 좋은 무대로 TV보다 더 가깝게 춤을 같이 나누는 게 목표에요.”

-어떤 춤이 그렇게 나눌 수 있는 좋은 춤일까.

최: 서로가 아는 이야기를 해야겠죠. 춤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그렇게 만들면 자꾸 보러가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해보려고요.

이: 현대무용이 난해하고 우리가 봐도 의아한 작품 많아요. 그래서 대중도 어렵다고 외면하죠. 그런 것 말고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최, 이: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겠죠.(웃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CJ E&M

[사진 설명]

② ‘댄싱9’ 무대에 선 이윤희(왼쪽)·최수진

③ ‘댄싱9’ MVP로 뽑힌 ‘블루아이’ 김설진과 결승전 믹스매치 무대를 꾸민 최수진

④ ‘댄싱9’에서 현대무용수 김경일과 함께 한 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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